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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주 Oct 12. 2023

여자의 방

나의 아뜰리에를 위하여

도로시 레싱 작. [19호실로 가다]는 주인공 수전이 남 부러울 것 없는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충실히 살다가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19호실로 간다. 그 공간을 사수하기 위해 가상의 애인을 만들면서까지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던 19호실을 이야기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을 강조하였듯, 레싱 역시 여성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잃지 않기 위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두 작품은 결혼을 목표로 달려온 인생이었던 것처럼 무난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그 누구 못지않게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 거센 파도를 일으킨 작품이었다.


당시 나는 육아로 지치고, 남편과의 사이에 대화를 하려고 하면 말다툼과 싸움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무엇이 문제일까?라고 매일 질문하였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몸과 정신이 지친 상태에서는 답을 찾을 에너지는 없었고, 그저 질문만 했다. 답이 없는 질문이란 매일 숨통을 조이는 일이었다.


그때, 내게 찾아온 그녀들의 이야기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책마저 멀리한 삶이었다면 답은커녕 인생을 헛살았을 것 같은 아찔한 시절이다. 꿈을 꾸며 육아와 집안일을 하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할 만했다.


보편적 성공이 아니라, 그저 나만의 공간을 가지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 그 상상만으로 숨통이 트이고 웃음이 났다. 상상 속 공간은 소박하지만, 즐거움이 있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차를 천천히 내려 천천히 마시고, 들 잠근 수도꼭지의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도 무심히 쳐다볼 여유가 있는… 아주 쓸데없고 자잘한 상상들로 채워졌다.


나의 꿈은 그저 공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나만의 공간을 가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날부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하지?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방치되어 관리하지 못한 주식이 있었고, 매월 남편에게 30만 원의 고정적 용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 돈은 다시 주식을 하기 위한 종잣돈으로 넣었다. 남편에게 특별 성과급이 생기면 일부를 떼어 나에게도 지분을 달라고 하여 소소하게 챙겼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정주부가 자기만의 계좌를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돈을 쓰지 않는 구조가 가정살림이기 때문이다. 언제 모을까 싶겠지만 생각보다 세월은 빨랐고, 생각보다 작은 돈이 큰 종잣돈으로 뭉쳐졌다.


읽기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작은 용돈이었지만 매월 돈을 모았다. 그저 작은 공간에 대한 꿈을 꾸면서.


작은 공간 앞에 어떤 타이틀의 간판을 내어 걸지를 매일 작명해 보는 호사스러운 상상도 했다. 그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어떤 소소한 일을 해야 될까?라는 구체적 대안도 고민하면서 차곡차록 공간을 가지기 위해 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애썼다.


아이가 3살 즈음이었다. 하루종일 아이의 식사와 간식과 요구에 시달리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지친 나머지 남편의 귀가에 눈빛 한 번 주지 못하고 바삐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제 막 퇴근 하고 들어왔는데 반겨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다. 아직 육퇴를 못한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요구에 더 억울했다. 퇴근시간도 정해지지 않은, 휴식 시간이 언제 주어질지도 모르는 묶인 몸에게 다 큰 어른의 요구는 그저 철이 없는 정도를 넘어 이기적으로 보였다.


그날 작심한 듯 나는 소리를 질렀다. “네가 육아해!!!! 내가 어떻게 벌든 돈을 벌어 올게. 내일 당장 휴직서 내고 와!!!”

정말, 돈을 벌 수 없으니 입 닥치고 육아나 해.라는 말을 남편은 한 적이 없으나 암묵적으로 압박 아닌 압박을 받았다. 그러하니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억눌러야 했다. 밖에서 돈 버는 일이 힘들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왕년에 돈을 안 벌어봤던 것도 아니니 나는 육아보다 돈 벌러 나가는 게 쉽다는 걸 비교가 되는데, 남편은 집에서 육아가 돈 버는 것보다는 덜 힘들다고 생각하던 때였지 싶다.

힘들다고 말하면 어쩔 거냐? 그럼 네가 나가서 돈 벌어! 나는 안 힘든 줄 아냐?라는 눈빛과 말은 상처로 고스란히 가슴에 꽂혔고, 매일매일 뛰쳐나가고 싶었다. 호기로 질러버린 말이 아니었다. 당신도 내 입장을 경험해 봐!!!라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말해도 실전과 이해는 다른 법이다. 며칠을 퇴근하는 남편에게 휴직서 내고 왔냐고 다그쳤다. 그렇게 말하면 남편은 “네가 먼저 직장을 구해!! 그럼 내가 휴직을 할게. “라고 맞받아쳤다. 팽팽한 싸움으로 그 끈질기고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 나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아주 천천히 단단해졌다. 육아를 거치며 자존감이 바닥을 쳤고, 우울감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을 때, 남편과의 시선, 말다툼을 피하면서 그게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나의 시간과 공간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생기면서 싸울 힘도 생겼다. 피하지 않기로 했고, 열심히 싸워보기로 했다. 마음의 소리를 하나씩 꺼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치사해서 미뤄두려 했던 말들도 애써 끄집어 언어로 소통하려고 했다. 그 과정 속에 큰 소리가 나기도 하고, 냉랭한 시간을 거치기도 했지만 차츰차츰 좋아졌다.


무엇을 갈구하는지, 어떤 일상을 꾸려가고 싶은지, 서로 호흡을 맞춰가다 보니 싸움이 잠잠해졌다.


어느 날부터 남편은 나를 지지해 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가 원하는 평범하고 따뜻한 일상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서로 큰 것을 바랐던 것도 아닌데, 그 작은 조각조차도 맞추는데 돌고 돌아 시간을 쌓아야 했다.


“나의 아뜰리에를 갖겠어!! “라고 노래를 불렀다.  

나의 말에 남편은 늘 시큰둥하고 불안해했다. “집에서 하면 되지!!” “돈은 있고?” “애는?” “어떻게 구할 건데?” 현실적 조언을 해 주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안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꿈을 덮어버리고 싶지 않다. 수전처럼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가상의 애인을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에게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작은 공간을 마련할 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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