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을 쓴다면
그런 날들이 있다. 유난히 키보드가 무겁고 뻑뻑하게 느껴지는 날. 그냥 두드리면 내가 원하는 글자, 단어가 하나하나 튀어나오는 여느 날과는 달리 키보드 한 자 한 자가 제대로 안 눌리는 것을 경험하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키보드 자판 하나하나를 누르기가 버거워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날이면 꿈에서는 여지없이 긴장감이 맴돌았다. 수업 시간에 책을 안 가져왔는데 하필 자신이 가진 몽둥이가 얼마나 튼튼하고 강한지 매 수업 시간 자랑하는 중학교 도덕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라거나,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날벼락같은 쪽지 시험 날이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연신 불안한 초인종이 울리는 문 앞을 마주하고 있다거나 하는. 꿈에서 깨면 현재의 내 상황과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그런 날들이 있다. 그런 날이면 빨리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과거와 미래의 나는 그곳에 있다.
누군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라고 했던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말을 반쯤 믿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혼자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 이등병 시절 탄약고 근무를 하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 첫 이별 후 감상에 젖어 혼자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 연인과 같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 첫 월급을 탄 날 버스를 타고 가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 이직을 결심하고 면접을 보고 본가로 향하는 나.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 시절 내가 공통적으로 막연히 밤하늘을 바라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큰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밤하늘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고 했던 생각은 유효했다. 나는 그날들을 길어다 어두운 공간에 틈틈이 저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것은 다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모든 내가 하나의 행위 혹은 밤하늘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혼자여도 괜찮았다. 혼자여도 괜찮으면 대부분의 것들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 뒤에는 생각하고 실행하면 되었다. 그뿐이었다.
여지없이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작은 창을 열어 밖을 좀 볼까 고민했다. 그전에 키보드를 몇 자 눌러보았다. 그 사이 기름칠을 한 것인지 훨씬 가볍게 타닥 하고 눌렸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도덕 선생님은 훌쩍 커버린 나보다도 훨씬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으며 말 안 듣는 남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강해져야 했었다는 것을, 날벼락같은 쪽지 시험을 어찌어찌 잘 마무리 짓고 중간시험이나 기말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차지해 잘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불안한 문 뒤에 있는 사람은 그래봤자 택배 아저씨이거나 세면대를 뚫어주려는 선한 인상의 기사님인 것을. 이 밤도 그렇게 길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이런 날들은 빛을 내고 있는 저 위의 여러 날들에는 끼지도 못한다는 것을. 그런 날들을 자세히 봐야 그제야 겨우 눈에 들어오는 날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런저런 날 모두를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Comment
이런저런 날들을 모아다 별자리 비슷한 것을 만들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에겐 터무니없어도 저한테는 그럴듯하지 않을까요.
처음 별자리를 만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