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상설전으로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 (2025.05.01. ~ 2026.05.03.)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 90여 점을 소개한다. 한국 미술계의 50여 년을 대표하는 작품을 선별한 만큼 어떤 작품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주요 작품이 잘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6부에 이르는 전시 주제도 시기별 주요 키워드를 담고 있어 한국 현대미술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점인 195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서 현대미술이 시작된 시점은 1957년 전후로, 6·25전쟁 이후 기존 미술에 저항하면서 나타난 ‘앵포르멜’이 여기에 속한다.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본적인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해 있던 상황에서 등장한 추상 회화의 흐름이다. 두터운 마티에르와 강한 붓질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앵포르멜을 대표하는 윤명로의 <문신 64-1>이 전시되어 있는데, 강렬한 원색과 검정색을 주요색으로 하며 격렬한 붓놀림이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1부에서는 김환기와 이우환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익숙한 이름의 작가들이지만, 원화를 직접 감상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은 관람객들이 오랜 시간 머무는 모습이었다.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는 붓을 떼어 물감에 다시 적시지 않고 단 한 번의 붓놀림으로 그린 작품이다. 반복적인 행위임에도 선들이 다르게 진행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섹션에서는 이성자, 최욱경 등 여성 추상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70년대 단색화 작품들, 그리고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한 80년대 수묵 추상화도 만나볼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대거 망라돼 있어 1부 전시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주요 부분을 짚는다면 단연 ‘실험미술’이 될 것이다. 실험미술은 2023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과 전시를 공동주최하면서 미술사적으로 한 번 정리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때 전시되지 않았던 작품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당시 전시되지 않았던 작품 중 눈에 띠었던 것은 곽덕준의 것이었다. 곽덕준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아 ‘개념미술’을 선보인 작가이다.
<계량기와 돌>은 ‘측정’ 시리즈의 일환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작가는 저울이라는 측정 도구와 돌이라는 불규칙한 자연물을 함께 배치했다. 저울은 명확한 수치를 제공하는 도구이지만, 사실 저울이 보여주는 숫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체계에 불과할 뿐 돌이 지닌 본질적인 가치를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또한 돌의 무게가 저울의 숫자와 일치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측정’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허구성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곽덕준은 이렇듯 무의미와 역설이 공존하는 조형적 실험을 통해 인간의 인식 체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2부에서는 이처럼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 작업, ‘신체’를 이용한 해프닝과 이벤트,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나 과정을 담은 작품 등 미술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유도하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의 실험미술 작품들은 서구의 아방가르드 미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듯하다.
세 번째 파트는 198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룬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도 많아 앞으로 한국미술에서 다시 한 번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흐름을 아우른다.
1980년대 나타난 미술의 경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신형상’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미술’이다. 먼저 ‘신형상’은 70년대 단색화와 같은 추상회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구상의 경향이다. 사물과 인물의 치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극사실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물론 신형상은 서구의 하이퍼 리얼리즘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며, 여러 갈래를 지니고 있다. 전시에 소개된 주태석, 지석철, 고영훈, 한운성 등의 작품은 당대 생동하는 현실을 포착해낸 것이다.
다음으로 ‘민중미술’은 현실 비판과 사회 참여 등 삶의 현장에서 현실주의 미학을 실천하고자 한 경향이다. ‘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협회’, ‘임술년’, ‘두렁’ 같은 소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민중미술의 확산은 정부의 탄압으로도 이어졌는데,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신학철이 <한국근대사-모내기>라는 작품으로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1980년대에는 커다란 두 가지 흐름 외에도 인간 소외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신표현주의적 경향이 등장했고, 젠더와 여성 문제에 주목한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도 형성된 시기였다. 세 번째 파트에는 1980년대 미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어 흐름을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1990년대는 섹션의 소제목으로 제시한 것처럼 ‘다원화’와 ‘세계화’라는 키워드가 가장 적합할 듯하다. 당시 미술계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1980년대가 ‘정치변동’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문화변동’의 시대로 불릴 만하다. 문화적 격변은 정치변화와 경제발전의 산물로 가능해졌다.
1990년대에는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신세대 미술’이 나타났다. ‘소그룹’은 말 그대로 작은 그룹 활동을 뜻하는 말인데, 한국 미술에서 소그룹은 미술가들이 모여 다원주의적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실험을 했던 양상을 일컫는다.
당시 한국의 신세대 작가들은 기존의 이념적 경직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실험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펼쳤다. 이불, 최정화 등이 참여한 ‘뮤지엄’을 비롯해 ‘메타복스’, ‘난지도’, ‘로고스와 파토스’, ‘황금사과’, ‘서브클럽’ 등이 그 예이다. 각각의 소그룹은 매체를 다변화하며 한국미술의 역동적인 지형 변화를 이끌어냈다.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 소그룹이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활동이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것 같다. 이들 소그룹은 큐레이터 없이 스스로 전시를 기획했고, 미술계에서 새로운 이슈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자신들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소그룹 운동은 한국 미술계의 맥락에서 새로운 미술 언어를 모색하고 한국 현대미술을 전환하고자 했던 시도로 기억되고 있다.
4부와 5부는 약간의 시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연결되는 시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4부를 대표하는 작가가 김수자, 서도호, 이불, 최정화 등이라면 5부에서는 김범, 박이소, 안규철, 정서영 등이 소개되고 있다. 양혜규는 4부와 5부 어디에 넣어도 될 만큼,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생각된다.
개념미술은 70년대 이건용과 성능경 등이 주도했던 ‘ST’ 그룹에서 처음 발견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에도 개념적 작업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서구의 개념미술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한 비물질적인 작업이라면, 한국의 개념미술은 물질을 중시하면서 기존의 의미와 질서에 질문을 던진다는 특징이 있다. 전시에 소개된 김범의 개념미술이 대표적이다.
김범의 작품은 익숙한 사물들에 대한 관람객의 예측을 뒤집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라는 작품은 사물의 기능과 형태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여 재조합하는 변형의 과정을 통해 사물의 본질과 외관, 그리고 사물에 붙여진 언어에 대해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자극한다. 김범의 작품 외에도 낯선 의미와 상황을 부여해 고정관념을 흔드는 작업들을 이 섹션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6번째 섹션에서는 사진, 미디어아트, 설치 등을 중심으로 미술의 역할이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동시대미술은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변화 속에서 전개되었다. 여러 장르를 횡단하는 다매체적 작업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이면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전시에서는 이 시기 한국미술의 한 장면을 대표하는 임민욱 작가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임민욱은 근대화와 도시화,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라지거나 소외된 존재들에 주목한다. 특히 그는 버려진 사물과 장소를 작업의 주요 소재로 삼아 그 흔적과 의미를 재구성해 나가는데, 이번 전시에는 <포터블 키퍼> 연작 중 하나가 전시돼 있다. <포터블 키퍼>는 잊힌 시공간을 지키고 복원하려는 의식을 치르는 현대판 샤먼 같은 존재다. 재개발 현장의 파괴에 맞서는 저항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상실감 등의 감정을 ‘토템’ 같은 오브제 속에 담아낸 것이다.
6부에서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동시대 작가 중 한 명인 김아영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이슈를 바탕으로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내러티브 기반의 영상,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살펴볼 수 있는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석유 자원 개발, 데이터 이송, 난민 문제 등을 SF적인 설정과 결합해 풀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현대사회의 이주와 공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난민 문제와 공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몇몇 작가를 언급한 것만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한 번 짚은 느낌이다. 긴 호흡이지만 의미 있는 작품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어 평소 한국 현대미술이 궁금했다면 흐름을 정리하기에 용이하다. 현대미술은 서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에서도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현대미술이 전개되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미술의 흐름에서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계속해온 작가들의 시도가 돋보이는 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