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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색조의 방식: 신선주

by 와이아트

한국의 중견작가 신선주(1972-)는 ‘검정 색조의 방식’이라는 타이틀로 작업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을 보여준다. 현재 나스 컨템포러리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검정 색조의 방식 : 지속하는》 (2025.04.08. ~ 06.28.)에서 그의 작업을 살펴볼 수 있다.




작품 제작 방식


신선주의 작업은 건축물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지난 20여년간 해외 여러 도시에서 만나는 인상적인 건축물을 촬영하고 이를 기반으로 작업해왔다. 작업의 시작이 되는 사진은 작가의 회화 작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본질이며 출발이 된다.


Art Buiding_새김.jpg 신선주, Art Buiding, 2019. Oil pastel, acrylic on canvas, 191x116.8cm. (출처: (재)호반문화재단)


신선주는 단순히 건축 외관의 화려함이나 이국적인 분위기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이 지어진 역사와 장소성, 가치를 만들어 온 시간에 의미를 두고 있다. 작가는 다른 문화권에서 느껴지는 친숙하지 않은 감정들이 건축이라는 대상을 만났을 때 겪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 전경.jpg 전시 전경 (출처: 나스 컨템포러리)


촬영된 건축과 도시의 표피는 눈과 손을 통해 다시 캔버스로 옮겨지면서 마치 설계도처럼 새겨진다. 작가는 사진을 찍은 뒤 이를 구조적으로 어떻게 배치할지 정하고, 화이트, 그레이, 블랙이라는 영역으로 크게 3등분을 해서 구도를 잡고 작품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작업을 하다가 남겨진 것들을 다시 블랙으로 덮으면 그 부분이 잔향으로 남게 되고, 그 다음 남겨지는 화이트는 밝음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목어.jpg 신선주, <목어>, 2021. (출처: 나스 컨템포러리)


작품에 주로 사용되는 재료는 ‘오일 파스텔’이다. 우리가 흔히 ‘크레용’이라고 부르는 이 재료는 단단해 보이지만 터치감과 질감이 부드러워 세밀한 작업을 하는데 용이하다. 작가는 캔버스에 검은색 오일 파스텔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펴 바르고, 얇은 송곳이나 나무 헤라를 사용하여 선을 그은 뒤, 다시 덧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해 나가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오일 파스텔로 가득 채워진 화면은 긁어내기, 즉 스크래칭(scratching) 방식으로 캔버스 속 공간을 마치 직조하듯 흑백의 톤이 완성된다. 오일 파스텔이라는 재료는 약간 질척하고 잘 마르지 않기 때문에 그 위에 니들로 드로잉을 하게 되면 섬세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출처: 아트비앤)


작가는 유학을 준비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 땀 한 땀 닦아내듯이 긁어내는 ‘스크래칭’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기법들을 실험해 보는 과정에 있었지만, 나무젓가락 끝부분을 활용해 쓱쓱 그어나가는 느낌이 좋아 스크래칭에 정착했다고 한다. 스크래칭이라는 기법인 만큼 굉장히 긴 호흡의 작업인데, 이미지로는 질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직접 보아야지만 작가의 작업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검정 색조의 방식(Manière-noir)이란?


작가는 ‘검정 색조의 방식’을 타이틀로 하여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개인전을 할 때마다 ‘검정 색조의 방식’ 뒤에 주제에 맞는 부제를 붙이는 식이다. 이번 전시의 부제는 ‘지속하는(Timeless)’으로 정해졌다.


ON.jpg 신선주, ON(Grand Central Terminal), 2023. (출처: 금호미술관)


<ON>이라는 작품에는 창문의 디테일이 표현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대칭적으로 드러나있다. ‘지속하는’이라는 전시 부제처럼 조금 더 작업이 진행될 수도 있다고 한다. 작가는 작업을 할 때 ‘검정’의 영역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선 ‘검정’을 가장 많이 넣고, ‘흰색’과 ‘검정’ 중간 영역의 경계선 같이 표현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늘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Santo agostinho.jpeg 신선주, Santo agostinho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작가가 사진을 통해 1차적인 작업을 했다고 해서 어떤 객관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장소에 충실한 것 같아 보여도 색면의 분할로 재구성한 풍경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생경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작가가 내면의 탐색을 통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간접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들며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맞닥뜨린 건축물과 심리적 감성이 이입된 모습이 검정 색조와 화이트 색감으로 나타난다.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스미는 감각이자 현상이라는 점에 비추어봤을 때, 공간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색조의 도입


작가의 작품이 모두 검정 색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희망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블루 색조를 작품에 도입한다. 가장 중요한 개념인 ‘검정 색조의 방식’에서 블루와 바이올렛 색감을 사용하며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것이다.


주간포.jpg 신선주, <주간포 (Bracket set between Columns, 숭례문)>, 2020. 캔버스에 새김, 오일 파스텔, 아크릴릭, 45×53cm.


작가가 처음으로 색을 실험한 작품은 <주간포>였다. 어릴 때 우리가 미술학원에서 실습하는 것처럼 다양한 색의 크레용을 먼저 밑에 깔고, 그 위에 검정색으로 뒤덮은 뒤, 바늘로 긁어내는 방식을 시도했다. 물론 작가의 경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컬러 톤으로 작업을 한 다음에 다시 블랙을 얹어서 스크래칭을 한 것이다.


블루 클라우드.jpg 신선주, Blue Cloud, 2021, 캔버스에 오일파스텔, 새김, 91×116.8cm. (출처: 나스 컨템포러리)


주간포(柱間包)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짜인 공포(栱包)로,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춘 우리 전통 건축의 요소다. 작가는 해외의 레지던시에 거주하며 주로 해외의 건축물들을 작품 주제로 가져왔으나, 코로나 시기에는 한국의 건축물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 요소들을 작품에 도입했다. <Blue Cloud>는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처마와 단청 사이에 걸린 달의 모습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신선주_Engine Company 33, 2016-22, 캔버스에 오일 파스텔, 아크릴, 새김, 180x180cm.jpg 신선주, Engine Company 33, 2016-2022, 캔버스에 오일 파스텔, 아크릴, 새김, 180x180cm. (출처: 금호미술관)


작가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Engine Company 33>는 뉴욕에 머물 때 브로드웨이 쪽을 거닐다가 만난 건물을 그린 것이다. 작가는 현란한 간판이나 환한 건물이 많지 않은 도로에서 이 건물이 유독 밝게 빛났다고 회고한다. 이 건물은 다름 아닌 소방서 건물이었다고 한다. 작품 제목인 ‘Engine Company 33’을 검색하면 실제 건물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작가는 이 건물이 반짝반짝한 보석 같기도 했고, 대칭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고 언급한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대칭이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데, 작업을 할 때에는 버블 수평계(수평자)를 사용한다고 밝힌다.


사진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 작품을 보면 하늘의 바이올릿 색채가 몽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이올릿 색채는 검정색과 미묘한 경계를 나누고 드러내면서 건축물이 품은 의미를 더욱 부각한다. 보랏빛 하늘은 건축물이 가지는 명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듯도 하고, 우리의 감정과 우주가 잇닿는 장에서 빛의 리듬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차갑고 건조한 건축 풍경에 특유의 감각과 감성을 녹여 깊은 공간감과 시간성까지 담아내고 있다.



신선주_Hmmmmmmmm..., 2011, 캔버스에 오일 파스텔, 아크릴, 새김, 150x200cm(2ea) 복사본.jpg 신선주, Hmmmmmmmm..., 2011, 캔버스에 오일 파스텔, 아크릴, 새김, 150x200cm(2ea). (출처: 금호미술관)


신선주의 작품은 검정색 오일 파스텔을 수도 없이 덧칠해가며 긁고 눌러 펴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통해 보는 이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먹보다 더 검은 색조의 검정을 통해 깊고 깊은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 듯하다. 건축물을 기하학적이고 차갑게 묘사한 것 같으면서도 작품을 계속 보다보면 감정이 느껴진다.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풍경은 실재하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 풍경이기도 하다. 다층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신선주 작가의 작품 앞에 서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그 이상의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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