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영아티스트’는 실험정신과 잠재력이 돋보이는 작가들을 선별하는 국내 대표적인 신진작가 공모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총 22회 공모를 통해 101명의 작가가 선정되었는데,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전시는 3명의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1부에서는 강철규, 송승준, 이해반의 개인전(2025.03.21. ~ 04.27.)이 열렸고, 2부에서는 강나영, 유상우, 주형준의 개인전(2025.05.09. ~ 06.15.)이 진행되었다.
먼저 강나영(1989-)은 ‘돌봄 노동’과 그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에 주목하는 작가다. 돌봄 노동은 스스로를 돌볼 수 사람들, 즉 아이나 노인을 비롯해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성인을 일상적으로 돌보는 다양한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전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작가는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과 함께 외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외출’이라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육체적·정신적으로 고된 노동이 된다는 점을 시각화한 것이다. 작가는 돌봄 노동에서 발생하는 물리적·정서적 긴장을 세심하게 포착해내는데, 돌봄이라는 책임이 여전히 가족의 몫으로만 남게 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설치 조형물 두 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왼쪽의 <10층> 작품은 ‘엘리베이터’를 형상화한 것으로, 불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돌봄 노동자와 돌봄 수혜자가 외출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작가는 휠체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면 다른 입주민이 불편해할까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길에 나가면 길이 평평하다고는 하지만, 휠체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울퉁불퉁하게 느껴질 듯하다. 작가는 <누구나 걷는 길>이라는 작품 위를 걸어보기를 제안하며 평소 우리가 감각하지 못하며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작가의 이전 작업 또한 사회적 소수자의 일상과 돌봄에 대한 관심을 담아낸 것이 많다. 두산갤러리에 전시되었던 <기대어 지탱하고 나아가는>은 실리콘으로 만든 살덩어리와 파편적인 신체 조각들을 통해 동안 사회적으로 은폐된 소수자의 신체를 묘사한다. 작가는 ‘회전문’과 같은 장치가 항상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는 오히려 닫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지만 인식하지는 못한 채 살아가는 차별적 요소들을 작품에 도입하며 소외된 존재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작품은 움직이는 ‘키네틱 조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조각이 돌아가면서 표면에 덧씌워진 코팅된 종이가 연약하게 떨린다. 강나영 작가는 재활을 해야 하는 신체를 떠올리며 작품을 제작했다고 말한다.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과연 정상적인 신체란 무엇인지, 정상/비정상이라는 개념은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든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 (2025.04.24. ~ 10.12.)에서도 강나영 작가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젊은 모색》에 출품한 작품은 한 가족이 영화 관람을 위해 현관문을 나서면서부터 벌어지는 상황들을 그리고 있다. 이전 작업이 신체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라면, 최근 작업들은 관점을 좀더 확장해 외부 공간에서의 돌봄과 감정을 재현한다.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해석되는 소수자들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다.
유상우 작가의 작품 소개로 들어가기 전에 《기억이 대지가 되는 곳에서》라는 전시 제목을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목에 잘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상우는 시간에 따라 소멸되어 가는 자연적 대상의 본질적 가치에 주목하는 작가이다. 특히 생태적 순환을 탐구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는데, 자연이나 생태를 다루는 동시대 미술가가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유상우 작가는 좀더 특별한 방식으로 생태라는 주제를 풀어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형 설치 작업 <가장 낮은 곳에 쌓인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작업은 작가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해 머물고 있는 시카고 지역에서 공원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해체되는 광경을 마주하며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한때 찬란한 불빛 속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사하던 트리가 조각난 채 차가운 땅 위에 쓰려져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잔해들을 작업실로 가져왔다고 밝힌다.
사진에서 보이는 나무가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버려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해체해 다시 자연으로 돌려놓은 모습이 인상 깊다. 유상우 작가의 작업을 보면서 ‘엔트로피(Entropy)’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를 뜻하는 말로,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로버트 스미슨을 비롯한 1970년대 대지미술 작가들도 엔트로피를 주제로 작업했다.
엔트로피는 가라앉고, 망쳐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낭비이기도 하다. - 이브-알랭 부아·로잘린드 크라우스,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中
유상우는 마치 무질서가 증대하는 방향에 잠시 개입하면서 삶과 죽음의 시간에 균열을 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물질을 그저 재활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이동과 새로운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생태적 순환을 은유하는 것이다.
안쪽 전시실로 들어서면 ‘종이배’ 작업을 살펴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일반 종이로 만들어진 것 같지만, 종이배의 재료는 작가가 버려진 꽃들을 수집해서 직접 ‘한지’로 제작한 것이다. 작가는 앞의 크리스마스 트리 작업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꽃을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낼까를 고민하던 차, 동양 문화에서 연꽃 등불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모습에 착안해 <강이 소원을 품을 때>라는 작업을 구상했다고 한다. 지역 사람들과 함께 종이배를 접어서 시간의 흔적을 담아 행한 작업을 통해 삶과 죽음, 기억과 상실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반대편 벽면을 장식한 <빛이 닿지 않는 방>도 흥미롭게 보았다. 이 작품은 정원에서 버려진 식물을 종이로 가공하고, 식물성 색소를 이용해 사진 이미지를 현상한 것이다. 작가의 과거 사진첩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은 ‘기억’이라는 전시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며, 작가가 담은 조부모의 이미지에서 정서적 감각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자연광에 의해 현상된 이미지이기 때문에 전시 기간 동안 외부 환경에 의해 점차 퇴색하며, 결국 종이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시 시작 시기와 종료 시기에 각각 방문했을 때 미세하게 달라진 색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작가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Material LAB’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작가가 직접 장소 특정적인 물질을 만드는 작업이다. 유상우 작가는 삶과 죽음의 요소를 통합해 지속 가능한 소재를 만들고,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생태발자국은 인간이 자연에 남긴 영향을 발자국으로 표현한 것으로, 인간이 소비하는 자원의 양을 그 자원의 생산에 필요한 땅 면적으로 환산해 표시한 것을 말한다. 작가는 자신이 개발한 지속 가능한 소재를 통해 생태적 순환에 기여하고자 하며, 홈페이지에서 작가가 개발한 물질들을 하나씩 클릭해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형준(1988-)은 ‘소원’이라는 인간 보편의 욕망을 동시대적인 시선으로 탐구하는 작가이다. 그가 말하는 ‘소원’은 신화나 영웅 서사에 등장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소망을 일컫는다.
나의 작업은 평범한 사람이 가지는 아주 개인적인 소망을 마치 신화 속의 영웅담처럼 그리는 그림이다. - 주형준, 작가노트 中
이번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 작가는 온 세상이 칠흑 같은 먹색으로만 보이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 빛줄기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인물 ‘Q’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가 ‘Q’의 소원 서사를 그려내는 방식이 독특한데, 거대한 화면을 분절시켜 제시하거나, 돌출된 구조물 위에 회화를 배치하는 식으로 관람객이 작품 속 서사를 입체적으로 읽어나가도록 유도한다. 삶의 미세한 균열과 그 틈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결이 잘 나타나 있다.
평면으로 제시된 작품도 있지만, 몇몇 곳이 돌출된 작품도 있다. 작가는 ‘Q’의 이야기 중 드러내서 보여주고 싶은 것과 숨기고 싶은 것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주형준 작가는 이야기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작품에서 가장 돌출된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보니, 가장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 기승전결의 서사 중 ‘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보였다.
작가가 계속해서 이어오는 작업의 결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소원’의 서사를 그려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백’이라는 공간을 확장시켜 표현하는 것이다. 분절되어 등장하는 여백은 작가가 이전에 선보인 ‘완성 연상’ 작업에서도 등장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분과 부분이 있으면 그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려는 지각 심리현상을 보인다. 가령 첫 컷에 ‘바위(묵)’가 있고, 다음 컷에 ‘보(빠)’가 있으면 두 개의 컷 사이에 ‘가위(찌)’를 상상하는 식이다. 작가는 컷에서 컷으로 넘어가는 빈 공간을 의도하면서 감상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이끌어낸다.
‘여백’에 대한 관심은 작가가 동양화를 전공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화면에 두루 퍼저 있는 기(氣)로 여겨졌는데, 여백은 사상과 마음의 공간을 의미하는 만큼, 이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작가는 완결을 지으려고 스스로 상상하는 것을 현대의 여백 개념으로 보고, 감상자의 상상을 그림 안으로 끌어들여 작품을 완성시킨다.
작가는 동양화의 현대화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화는 크게 채색화와 수묵화로 나뉘어지는데, 둘은 붓으로 칠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난다. 채색화는 ‘칠하기’, 수묵화는 ‘번지고 스며들게 하기’라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의 2017년도 채색화 작업을 보면, ‘중채(重彩)’라는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채’는 동일한 색, 또는 서로 다른 색을 중복하여 칠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 번 겹쳐서 칠한 모습이 유화 물감이나 아크릴 물감과는 달라 보인다. 최근 작품에서는 색을 사용하지 않은 채 전통 재료로 ‘질감’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장지에 먹으로 그린 신작 <이윽고 공중에 마지막으로 길게 휘날렸다. 아직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작가가 말하는 ‘질감’이 붓으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번 금호영아티스트 2부 작가들은 동양화와 설치미술, 생태작업까지 뚜렷한 작업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세 명의 작가 모두 동시대미술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가들인 만큼, 작가들의 독특한 관점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