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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아트 Sep 15. 2021

무형의 조각, 고정관념에 맞서다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이승택(1932~)은 바람, 물, 불, 연기와 같은 비물질적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 조각의 범주를 확장한 예술가다. 이승택은 함경남도 고원에서 출생하여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였으며, 전쟁에서 느낀 상실감과 허무감은 그로 하여금 실존주의 철학에 탐닉하게 만들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을 접하면서 서양의 관념적 형이상학을 내면화했고, 이러한 철학은 그를 반항적이고 이단아적인 기질을 지닌 작가로 이끌었다.


저항적 기질에서 나온 이승택의 반(反)예술 개념은 그의 다양한 작품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 조각을 전공한 이승택은 형체가 없는 조각을 만들어내며 전통적 의미에서의 조각을 해체하였는데, 이는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승택의 반예술적인 조각 작품들은 ‘비(非)조각’으로 불리며, 이는 조각 개념에 반대하는 반(反)조각을 넘어 ‘조각이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는 ‘비조각’을 통해 우리에게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현재 미술관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서 온라인 전시를 감상할 수 있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채널)


이승택이 활동하던 한국의 1960~1970년대는 전쟁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억압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집단적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미술계에서도 새로움을 찾고자하는 실험적 시도들이 이어졌으며, 당시 A.G.(한국아방가드르협회)가 등장하기도 했다. A.G.는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단체로, 전위예술을 내세워 한국 미술을 새롭게 하고자 했으며, 이승택도 초기 A.G.에서 활동했다. 이승택이 A.G. 2회전에서 선보인 <바람> 시리즈는 바람, 물, 불, 연기, 안개 등 형체가 없는 소재를 가지고 자연의 움직임과 형태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바람> 시리즈는 조각이라는 개념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작품으로 해석된다. 당시 조각의 재료로 인지되지 못했던 소재를 선택하고 현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당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승택, <무제>, 1970(1971 인화), 사진에 채색, 40×58cm, 작가소장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무형의 원소를 시각화(바람에 나부끼는 저 무수한 헝겊 조각의 작품을 보라)하는 물리적 수단을 통해 조각의 개념을 형태에서 상태로 바꾸어 놓았다.” 

-오광수·미술평론가 


이승택이 <바람> 시리즈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64년 화판에 불을 붙여 한강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그린 드로잉 <무제(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을 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의 ‘형체 없는 작품’이 등장하는데, 이는 조각이라는 틀을 벗어나려는 ‘비조각’ 개념의 핵심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조각은 고정된 형태의 단단한 덩어리이다. 하지만 <바람> 시리즈를 비롯한 그의 조각 작품들은 비물질적인 소재를 다루며 비시각적인 것을 시각화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작품들을 불태움으로써 작품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불태워버리는 행위는 기존의 관념과 가치관에 대해 거부하고 저항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승택, <무제(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 1988년경, 사진에 채색, 81.5×11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나의 조형의식은 철저한 거부와 저항기질을 근간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그 결과로 야기된 실험작업―1964년과 1970년 기체, 불, 연기, 바람을 이용한 작품들―을 통해 청년시절의 나의 열정을 들끓게 하였고, 특이한 매체로 이루어진 작품은 ‘형체 없는 작품’을 배태시키는 나름의 신화를 만들었다.”

- 이승택 


일반적으로 조각은 깎거나(carving) 살을 붙이는(modeling) 방식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조각의 개념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지속했던 이승택은 ‘감기’와 ‘묶기’라는 방식을 고안해낸다. 그의 초기작인 <역사와 시간>(1958)은 포물선 모양의 석고 덩어리에 적색과 청색을 칠한 후 가시철망으로 감은 것이다. 작품의 제목처럼, 이 구조물은 작가 개인의, 혹은 한민족의 역사와 시간을 나타낸다. 적색과 청색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세력과 좌우 이데올로기를 의미하며, 둘둘 말린 철망은 냉전으로 겪은 한민족의 고난을 비유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원시적 주술 도구처럼 보이기도 하는 <역사와 시간>은 당시 전통적인 조각 개념과는 거리가 먼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감기’와 ‘묶기’의 방법을 활용하는데, 이는 사물의 형태를 뒤집고 낯익은 것들을 전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승택, <역사와 시간>, 1958, 가시철망, 석고에 채색, 153×144×23cm, 국립협대미술관 소장.


이승택은 ‘감기’와 ‘묶기’의 대상으로 시멘트, 석고, 기와, 나무 등 여러 소재를 선택했으며, 그 중에서도 ‘고드랫돌’을 자주 사용했다. 고드랫돌은 손으로 돗자리를 엮을 때 사용하는 홈이 파진 돌이다. 이승택은 이처럼 한국의 민속품에서 현대미술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고, 주술적, 제의적 행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고자 노력했다. 조수진 미술사학자는 지난 3월 6일 유튜브로 생중계된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연계 학술세미나에서 이승택의 고드랫돌에 대해 “골동품의 외형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창조적 발상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했다. 민속품으로서의 고드랫돌이 한민족의 과거 일상을 대변하는 문화의 영역에 속한 사물이라면, 이승택의 고드랫돌은 미술가라는 개인에 의해 미학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 사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많은 전통적인 것들은 문화적 가공물로서의 민속품의 영역과 독창적 창조물로서의 예술품의 영역 사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오고간다. 


이승택, <무제>, 1974, 돌, 철사, 29×35×32cm, 작가소장.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한편, 이승택은 일찍부터 ‘사진’이라는 매체에 천착했다. 사진은 그의 퍼포먼스나 설치 작업을 기록하는 주요한 매체로 기능했다. 그런데 이승택은 사진을 기록 매체로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인화된 사진 위에 다른 사진을 콜라주해 붙이거나, 채색을 덧입히면서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이승택은 배경 공간과 이미지를 합성해 포토몽타주와 같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사진 속으로 들어가 재촬영했다. 이승택의 1987년 작품 <모래 위에 파도 그림>은 바닷가에서 퍼포먼스를 촬영한 뒤 인화된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 ‘사진-회화’ 혹은 ‘포토픽쳐’로 불린다. 이러한 이승택의 사진 작업들은 이질적 이미지들이 충돌하는 낯선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승택, <모래 위에 파도그림>, 1987, 사진에 채색, 91×114cm, 작가소장.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 

- 이승택 


이승택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 기초한 우리의 미술을 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 같은 서구의 미술을 탐구한 데 반해 이승택은 민속적인 모티프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양은그릇, 솥뚜껑, 연탄재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세계를 확장시키고 현대미술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영국의 서펜타인 갤러리 디렉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이승택에 대해 “세계 미술사에 남을 독자적인 작가”라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승택의 작품세계는 ‘조각’에서 출발해 ‘비조각’에 이르고, 이러한 ‘비조각’은 다시 드로잉, 회화, 퍼포먼스, 사진-회화 등으로 제작되며 장르를 뛰어넘는다. 그의 폭넓은 예술 세계는 당시 한국 조각가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람, 물, 불과 같은 소재로 작업한 <바람> 시리즈는 실존과 허무, 소멸의 의미를 환기시켰으며, ‘감기’와 ‘묶기’ 시리즈를 통해서는 익숙한 것에 대한 결별을 선언했다. 그의 ‘비조각’은 조각 개념을 해체하고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우리는 기존의 질서와 고정관념을 거부했던 이승택의 예술세계를 통해 새로움과 가능성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본 글은 '프럼에이'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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