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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순 Jul 29. 2024

완벽한 하루를 가능케 하는 묘약

EBS 다큐프라임 <완벽한 하루>가 남긴 생각들

“여기가 천국이야.” 

“평생 가장 편한 이발을 했어요.” 

“난 분명히 여기 죽으러 왔는데, 내가 이렇게 편안해도 돼요? 내가 이렇게 아프지 않고 잘 지내도 돼요?”

“편하게 아무 걱정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 여기 와보니까 방법이 많더만.” 


지난 5월 13일부터 20일까지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작이 방영되었다. 1부 ‘완벽한 하루’는 호스피스에서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위 글들은 그곳 환자들이 남긴 말들이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보내드린 딸은 어머니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가 뭔지 등 상대에게 호감이 있을 때 물어볼 만한 것들을 사회복지사님이 어머니에게 물어보셨다고 떠올렸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말도 많이 하시고 많이 웃으셨다고, 삶의 마지막을 기억한다.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에 따르면, 아무리 좋은 병원에 계시던 분들이라도 오랫동안 목욕 한 번 못한 채 살아오신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세수 한번 했으면’ ‘시원한 물 한번 맞았으면’ 하는, 그들의 작지만 절실한 바램을 실현해주는 것이 곧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말기암 상태의 할머니에게 의사가 다가와서 불편한 것이나 바라는 것은 없는지 묻고 살피자 할머니는 침대를 내려가서 어디 다니지를 못하니 불편하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의사가 어디 가고 싶으신가 보다고 하자, 할머니는 불안해하면서도 “그리우던 (고향) 산천이고 뭐 이래 좀 돌아보고 그러면서 망중 삼아 좀 다녀보려고 하는데”라고 마음 속 바램을 털어놓는다. 


마지막으로 고향을 가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바램이 여러 사람들의 도움 속에 이루어졌다.


“도와드릴께요”라는 의사의 대답과 함께 할머니의 고향 여행은 준비되기 시작했다. 있을 수도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준비하고 또 감수하며 그들의 가족 여행이 준비되었다. 할머니는 차 안에서 자녀들과 찐빵을 나눠 먹고,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를 부르며 고향을 향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지만, 죽음까지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고 ... 그냥 사는 거죠. 여기도 똑같이”라고 간호사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죽음까지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인간답게 나답게 사는 것,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존엄한 삶과 죽음을 위한 길일 것이다. 


‘죽기 좋은 나라’라는 별명을 갖게 된 영국의 경우, 호스피스 제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이 우리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는데, 그들은 죽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내가 이미 죽음에 가까워진 타인을 위해 나선다고 생각한다. 


늙음과 죽음이 혐오와 회피의 대상이 되어버린, 노인시설이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자신이 막아냈다고 국회의원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 죽음 앞에 선 자들이고, 또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라는 연대의식이 깔려있는 듯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기본적 삶과 죽음을 책임지고자 하는 국가, 애정과 전문성으로 존엄한 삶과 죽음을 돕는 전문가, 한 사람의 죽음의 과정은 우리 공동체가 함께 도울 일이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기부와 봉사를 하는 시민들 덕에 영국은 죽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말기 암 환자의 95%가 호스피스를 이용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영국의 호스피스는 대표적인 ‘국민시설’인 셈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들 중 20%를 조금 넘긴 사람들만이 호스피스의 돌봄을 받고 있다. 이 말은 한 해 수만 명의 말기암 환자들이 심신의 고통을 외롭게 견디며 죽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유럽완화의료협회에 따르면,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인구 100만 명당 최소 50개의 병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30개를 넘긴 상황이다. 애초에 호스피스 입원 자격(?)을 얻기도 힘든 데다, 설령 자격이 되더라도 ‘입원 대기 중 사망’에 이르는 환자도 많다. 


이곳 호스피스 원장에 따르면,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도 임종까지의 기간이 대개 3주 미만이고, 어떤 경우는 1주 이내이다. 생명이 1주일 남은 사람이 극도로 힘든 상황에서 호스피스로 헐레벌떡 와서 자기 인생을 제대로 정리하고 마감할 수 있겠는지를 안타깝게 묻는다. 


삶의 시작이 돌봄 없이는 불가능하듯 삶의 마무리 역시 따뜻한 돌봄 없이는 초라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 의존과 돌봄은 특별히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특별 조치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인 인간을 살게 해주는, 우리 삶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영상을 보고 나니 ‘왜 제목이 ’완벽한 하루‘지?’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곳 사람들의 삶에는 나의 작은 바램이 함부로 취급되거나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보였다. 내가 손을 내밀면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리라는 믿음, 그리고 차마 내밀지 못하는 손을 먼저 잡아주는 손이 있었다. 따뜻하게 살피는 눈길과 내미는 손길들이 그들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묘약이 아닐까 한다. 


이 묘약은 병상과 시설과 인력이 부족한 우리 상황에서 특별한 개인들의 헌신만으로 지속될 수는 없다. 『드라이빙 미스 노마』의 주인공 노마는 90세의 나이에 자궁암 진단을 받고 나서 아들 부부와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시간을 여행하다가 캠핑카에서 호스피스의 돌봄을 받으며 죽음을 맞았다. 읽는 내내 나에게 감동과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미스 노마의 완벽한 하루들은 미국이라는 사회가 갖춰놓은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가와 전문가와 사회 구성원 전체가 각자의 위치에서 돌봄의 뿌리를 든든하게 내릴 때, 우리는 삶의 마지막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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