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나들이 다녀온 썰 풉니다
회사를 다닌지 꽉 채운 3년이 될 무렵 IT부서에서 지원부서로 팀을 옮겼다. 스스로의 의지였다. 더 이상 야간근무와 주말근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매주 혹은 격주마다 진행되는 삼겹살에 소주 뿐인 회식도 질렸다. 심지어 매일 반복되는 팀 점심메뉴는 부대찌개 아니면 칼국수였고, 지겨워서 약속을 잡아 점심을 따로 먹는다고 말하면 온갖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네가 연예인이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스케쥴이 왜 이렇게 많냐고. 아니 일주일에 두번 일하는 연예인이 어딨담.)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기술자들이 보기엔 그런 이유들로 IT를 벗어나는 나의 선택이 무모해보였는지, 조직개편 발표 당일 많은 충고를 받았다.
너 커리어는 어쩌려고 그러니, 이제 너는 이직 못한다, 거기 잡일 하는 팀 아니니, 너네 팀장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라는데 어떡하니.
아무도 이유는 묻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래서 그저 충고가 하고 싶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께하는 3년 내내 그랬듯이.
시끄러운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 근데 제가 입신양명이 하고 싶었으면 이 회사에 왔겠어요?’
내가 십 년 넘게 몸 담고 있는 회사는 지자체가 1대 주주로 있는 독특한 회사다. 생긴지 20년이 채 되지 않아 내가 공채 2기다. 공채 1기에는 우리 과 선배 3명이 있다. 그 중 한 명은 3학년 때 같은 수업을 듣다가 친해진 언니라 지금도 휴일에 만나는 사이. 그 언니 덕분에 이 회사를 지원하게 된 것은 맞지만, 4학년 때 다른 회사 취업 설명회에 갔다가 지금 회사를 ‘신이 숨겨둔 직장’이라고 말하는 이야길 들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느낌이 왔다.
적당히, 편하게,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점
긴 근속년수가 증명하는 고용 안정성, 대기업 수준의 복지와 연봉, 반독점의 안정적 사업구조, 높지 않은 업무 난이도, 야근 없음, (한시적이지만) 7시간 근무, 서울에 있음, 노조 있음
단점
싫은 놈도 안나감, 일 안하는 놈들도 안나감(안 쫓아냄), 꼰대 많음, 심지어 그들끼리 많이 친함, 자꾸 사장만 바뀜, 연봉 상승률 낮음
생각보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장단점을 나열했는데, 막상 써놓고 보니 나쁜 회사는 아닌 것 같아서 당황스럽다.
그렇지만 단점에 나열된 사람들이 너무 싫었다. 업무분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R&R을 따지면서 일하냐는 ㅇ책임도, 후배 직원들에게 일을 미루고 싶어 안달난 ㄴ책임도, 시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매번 이슈를 만드는 ㅂ책임도, 이 모든 이들을 방치하는 팀장들도 지긋지긋했다. 어느 날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수준의 환멸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입사 이래로 처음 면접을 봤다.
사실 게으른 내가 직접 찾아본 것은 아니고, 작년에 금융권으로 이직한 후배가 비즈니스 직군 집중 채용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딱 내 직무를 모집하는데, 경력기술서만 쓰면 되고 실무면접과 임원면접을 하루에 다 한다고 했다. 너무 간결하고 부담이 없는 이직 절차였다. 그래서 3시간 만에 입사지원서 작성을 마쳤고, 서류 전형이 종료된 후 면접을 보러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왜일까, 막상 면접을 앞두고 아무 준비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 선택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판교에 있는 회사(왕복 2시간), 8시간 근무(1시간 추가), 요즘 야근을 하는 후배(추가시간 가늠 불가)를 떠올리며 2,3천만원의 연봉이 3시간+a의 가치가 있나 의문이 들었다. 한 달에 일이백 더 벌자고 이직을 하는게 맞나? 워라밸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내가? 차라리 지뢰가 어디 숨겨져 있는지 아는 지뢰찾기 게임을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심지어 여기에는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줄 아군도 많은데. 생각해보면 다른 동료들도 다들 조금씩 모자라서 그렇지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닌데.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일단 사고 싶었던 자켓을 샀고, 자켓을 산 덕분에 아리까리한 마음으로라도 면접을 보기로 결심했다. 해보면 알겠지. 이직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
면접 날 새로 산 자켓을 입고 출근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새 옷 최고.) 심지어 오후 반차를 내고 회사를 나와 판교 가는 버스를 타니 신이 났다. 현대백화점을 구경하다가 근처에서 일하는 친한 동생을 불러내 차도 얻어마셨다. 어이 없게도 시간을 잘못 알고 일찍 면접장에 가는 바람에, 대기실에서 떨고 있던 어린 양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탈 ㅇㅇ은행을 꿈꾸는 여신업무 2년, 수신업무 1년차의 병아리의 긴장을 풀어주며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병아리가 내 손을 꼭 잡고 너무 고맙다고 했다. 원하는대로 붙었기를.)
실제 면접은 너무나 업무 미팅 같아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왔다. ㅇㅇ카드는 루피카드도 내고 미니언즈도 내는데 다른 라이센싱은 생각이 없으신가요? 계속 자사 캐릭터만 쓰실건가요? 칩이 두개 들어있는 카드는 만들 생각이 없으신가요?
질문을 주고 받다가 불현듯이 깨달았다. 내가 던지는 모든 질문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일을 여기에서도 계속 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라는 걸, 실은 나는 지금 담당하고 있는 일을 좋아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서로의 건승을 기원하며 40분만에 면접장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유퀴즈 놀이를 하고 있는 인사팀에게 붙들려 경품을 뽑았는데, 그 날 준비한 상품 중 가장 비싸다는 ‘춘식이 해먹’에 당첨이 되었다. 직원들이 나를 둘러싸고 박수를 쳐주었다. 면접비 대신 스타벅스 3만원 충전권도 받았다.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얼른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굉장히 재미있는 판교 나들이었다.
그 이후로도 나의 회사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매일 싫은 것들이 존재한다. 저 사람은 왜 굳이 저렇게 일하면서 시간을 허비할까, 말을 왜 저따위로 해서 사람들을 빈정상하게 만들까 의문이 든다.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역시 실망한다. 사람들의 부족한 부분들만 자꾸 보인다.
하지만 다른 것도 보인다. 지금 회사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내 편,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커피 한 잔 사주며 기꺼이 알려줄 선배들도,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줄 사람도 꽤 많다. 심지어 하고 있는 일은 재미있다. 면접 덕분에 알았다. 쏟아지는 비를 헤치고 판교 놀러 갔다 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