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수면 : 메모지의 여섯 줄

by 박정효

월요일 6시 58분, 알람이 울리기 직전. 한순간의 미세한 정적이 방을 지나갔다. 커튼 틈으로 비집고 든 빛이 이불 가장자리를 얇게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눈을 뜰까, 한 번 더 눌러 붙을까. 이담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일이 일어났다—알람이 울리고, 멈추고, 다시 울리고.


7시 21분, 세 번째 알람. 그는 이불 끝을 걷어 올리며 입속으로 말했다.

“커피 두 잔이면 버티지.” 욕실 거울은 그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샤워기 물줄기가 어깨뼈를 두들기는 동안 한밤중에 뒤척이던 장면이 컷 편집처럼 잘렸다 붙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던 순간, 새벽 2시 18분이라는 숫자,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 스크롤—끝없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짧은 영상들. 웃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 그저 깨어 있게 만든 빛. 그는 샤워기 수온을 한 톤 낮췄다.


피부에 닿는 온도가 천천히 식으며 몸은 졸음을 불러올 미래의 신호를 회상했다. ‘식는 체온 = 졸음의 초대장.’ 어젯밤의 자신에게 보내고 싶은 메모였다.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쳐 매다가 이담은 냉장고에 붙여놓은 작은 종이가 생각났다. 영수증만 한 크기, 구겨진 모서리. 온유가 “떨어뜨린 김에 네가 가져”라며 건네준 그것.


전날 밤 그는 종이에 적힌 여섯 줄을 눈으로 더듬고 침실로 들어갔다. ‘폰은 거실’이라는 한 줄이 유난히 굵어 보였다. 어젯밤—그 한 줄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목 뒤를 간질였다. 2호선이 강을 건널 때 창밖의 물빛은 어제와 동일하게 반짝였다. 회사 메신저엔 “10시 킥오프, 핵심 3포인트 정리”가 깜빡이고, 그의 눈꺼풀은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웠다.


옆자리 승객의 책장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소리가 졸음과 의식을 번갈아 흔들었다. 그는 ‘오늘 아침 산책 5분’이라는 메모를 한 번 더 떠올렸다. 지하철을 내리면 로비 앞 화단을 한 바퀴만 돌아보기. 작은 약속 하나가 낮의 바닥을 조금 두껍게 해줄 것 같았다.


오전 10시 20분, 회의실. 스크린 아래 “메인 포인트 3가지” 중 마지막 줄에서 문장이 멈칫했다. 팀장이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 다음은요?”

목이 말랐다. 그는 종이컵을 꽉 쥐었다. 종이컵이 얇게 바스락하고 울었다. 말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늘 마지막 한 문장 앞에서 멈췄다.


회의가 끝나고 편의점 앞에서 잠시 멈춘 그는 단 음료에 손이 갔다가 물 병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또 단 음료를 집었다가를 반복했다. 카페인 컷오프—오후 2시 이후 X. 결국 그는 물을 집었다. 어떤 선택은 양심 같고, 어떤 선택은 잠 같았다. 계산대에서 들숨을 길게 넣고, 내쉬는 동안 화면을 뒤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 순간만큼은 선택이 그를 선택한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시간 강 건너 코워킹 스페이스. 온유는 유리창에 이마를 살짝 대보는 아침 의식을 마치고 손바닥만한 타이머를 눌렀다. “오전 빛 7분.” 창밖의 빛이 책상에 얇은 줄무늬를 깔았다. 컵 가장자리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왔다.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뒤집은 채 부엌 콘센트에서 충전 중. 여섯 줄 메모의 두 번째 줄—자기 전 60분 불 낮추기·화면 끄기—는 이제 그녀의 밤의 예절이자 아침의 보험이었다.


점심 무렵 온유는 공원에서 10분 걸었다. 이어폰 없이. 걸을 때 문장의 리듬이 정돈되곤 했다. 오늘 번역은 의료 기사였다. 영어의 건조한 문장을 한국어의 체온으로 옮기는 작업. 벤치 등받이에 부딪히는 바람이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때 이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아침 산책 또 놓쳤다. 오후엔 바쁘지?” 그녀는 “괜찮아”라고 쓰다가 지웠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대신 가방 속 작은 메모철을 한 번 더 눌러보았다. 종이의 감촉만으로도 마음의 톤이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퇴근 무렵 회사 로비 엘리베이터 앞. 문이 ‘딩’ 하고 열린 순간, 온유의 손에서 작은 종이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떨어졌어.”

이담이 줍자, 온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네가 가져도 돼.”

“이게 뭐야?”

“그냥… 나한테 필요한 여섯 줄.” 얇은 글씨. 오른쪽 아래 작은 별표.


07:00 기상(주말 포함)

자기 전 60분 — 불 낮추기 · 화면 끄기 (폰은 거실)

취침 2시간 전 — 미지근한 샤워 (식는 체온 = 졸음 신호)

카페인 컷오프 — 오후 2시 이후 X

20분 룰 — 잠 안 오면 침대 밖, 졸리면 돌아오기

아침 빛 5–10분

(의지가 아니라, 궤도)


“비법 같은 건 없네.”


“비법이었으면 더 반짝이는 종이에 썼겠지.”

온유가 웃었다.


“그냥, 살아보니까 필요하더라고.”


“강요하려는 건 아니고?”


“강요용이면 이모티콘도 달았을걸.”


문이 닫히자 메모의 잉크 냄새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이담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부끄럽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게였다. 어떤 사람의 하루에서 뜯겨 나온 증거 같아서.


집. 부엌 콘센트에 휴대폰을 꽂으면서 그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알림 불빛이 꺼진 부엌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커튼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벌려두었다. 바깥의 어둠이 방으로 조금 흘러들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잠이 길을 잃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십 분, 이십 분. 잠은 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화면을 켰겠지만 오늘은 20분 룰을 떠올렸다. 부엌 불을 켜지 않고 싱크대 옆에 엎어둔 책을 펼쳤다. 글자들은 잔물결처럼 조용히 흘렀다. 그 조용함을 베개로 가져왔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참 좋았다.


다음 날,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이 떠졌다. 놀라워서 한 번 더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떴다. 커튼 사이로 연필심 같은 새벽빛이 들어왔다. 부엌에서 전기주전자가 물 끓기 직전, 짧게 숨 들이쉬듯 '후—' 하고 소리를 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는 여전히 졸았다. 문이 열릴 때 잠깐 흔들렸고, “아, 또”라는 한숨이 자기에게로 돌아왔다. 당신도 아는 그 감각—심장은 달리자고 하는데 다리는 모래주머니 찬 날.


그 주의 어느 오후, 회의에서 마지막 문장이 끊기지 않았다. 그는 마침표를 찍고도 잠깐 침묵했다. 옆자리 동료 지아가 어깨를 톡 건드렸다.

“오늘 말이 매끈했어.”

칭찬이라기보다 관찰처럼 들렸다. 그게 더 안심되었다.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물이 목을 지나는 동안 강가 벤치가 떠올랐다. 빈 벤치. 가끔 빈자리 자체가 약속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온유의 하루도 매끈하기만 하진 않았다. 프리랜서에게는 “퇴근”이 없다. 만들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온유는 저녁이 되면 컴퓨터 전원을 아예 뽑아 둔다. 그 습관을 만들기 전에는 새벽까지 번역하다 낮의 문장이 흔들리는 날이 잦았다. 전원을 뽑을 때, 그녀는 늘 눈을 감고 다섯을 셌다. ‘오늘은 여기까지.’


목요일 밤, 온유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예전에 한 번 크게 무너졌어. 그래서 이 여섯 줄이 필요했어.”


“회사 다닐 때?”


“응. 프리랜서 되고 나서도 비슷했지. 그땐 ‘자유’가 숙제였거든. 끝이 없어서.”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끝을 먼저 만들고 시작해. 아침엔 열고, 밤엔 닫고.”


밤들이 쌓였다. 샤워 후 창문을 손바닥만큼 열어두자 식어가는 온도가 졸음을 끌고 들어왔다. 깨어나는 날엔 억지로 붙잡지 않고 조용히 돌아눕는 요령이 생겼다. 휴대폰은 부엌의 하얀 콘센트 아래서 잤다. 침실 공기의 톤이 낮아지고, 베개에 밴 냄새가 익숙해졌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변화들—그것들이 하루의 바닥을 조금씩 다지기 시작했다.


열흘째 아침, 벤치는 비어 있지 않았다. 온유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둘은 말보다 발소리를 먼저 맞췄다. 강변을 걷다 멈추다, 걷다 멈추다.


“어제 몇 시쯤 잠들었어?”


“모르겠어. 시간을 안 봤거든.”


“그게 제일 좋지.”


“뭐가?”


“잠이랑 시간을 굳이 친하게 해줄 필요.”


그들은 같은 곳을 오래 보았다. 신호 대기 중인 자전거, 물수제비를 연습하는 아이, 레몬색 헬멧, 강물을 따라 이동하는 빛. 별것 아닌 풍경들이 궤도를 조금씩 밀었다.


점심, 사무실 식당. 그는 자동으로 커피를 향하던 손을 멈췄다. 대신 물을 두 잔 마셨다. 오후의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발끝이 덜 무거웠다. 세 시쯤 누군가의 말이 칼처럼 느껴졌던 순간이 지나갔다. 그는 대답을 늦췄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낮아 있었다.

“오늘은 안 싸우자.”

속으로 말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말처럼, 자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저녁, 코워킹 스페이스. 온유는 전원을 뽑고 가방을 닫았다.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잠깐 보았다. 퇴근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낯설었다. 전원을 뽑을 때마다 조금씩 친해진다. 어떤 날은 “지금 번역이 너무 잘돼서” 손이 망설이지만, 그런 날일수록 뽑아야 다음 날 문장이 덜 흔들린다는 걸 몸이 배웠다. 몸이 배운 것들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주말, 두 사람은 약속을 잡지 않았다. 대신 같은 시간에 각자 산책을 했다. 서로의 위치 공유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만의 작은 장난이었다—같은 강가를 다른 시간에 걷는 일. 어느 순간, 서로가 같은 가로등 앞을 지나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둘은 휴대폰을 어루만지다가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연락을 하지 않아도 연결되는 방식들이 있다.


다음 주 화요일, 이담은 빔프로젝터 앞에서 입을 열었다.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목소리가 예상보다 안정적이었다. 단어들이 힘들이지 않고 좌석을 찾아 앉았다. 끝나고 팀장이 말했다.

“이 페이스 유지해요.”

유지라는 말이 오늘은 부탁이 아니라 제안처럼 들렸다.


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온유가 팔을 뻗어 문을 잡았다.


“내일은 네가 먼저 얘기해줘.”


“무슨 얘기?”


“오늘의 색. 직장인의 하루는 무슨 색이었는지.”


“오전은 회색. 오후는 파랑. 밤은… 아직 비어 있어.”


“좋네. 빈칸은 내일 채우면 되고.”


집. 메모는 냉장고 자석 아래에 붙었다. ‘메모지의 여섯 줄’은 누군가의 설명이 아니라, 살아진 삶에서 뜯겨 나온 증거처럼 보였다. 그래서 믿을 수 있었다. 불을 끄자 방이 더 선명해졌다. 커튼은 반쯤, 어둠은 반쯤. 부엌에서 자는 휴대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그는 떠올렸다—왜 요즘 더 예민했고, 왜 말이 자꾸 끊겼는지. 답은 복잡하지 않았다. 밤이 무너지면 낮은 빌려 쓰게 된다. 빌려 쓴 낮은 이자가 붙는다.


그 생각을 하다가 그는 잠들었다. 다음으로 연습할 건 분명했다—감정의 파도에 먼저 이름을 붙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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