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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dermovie Mar 22. 2023

삶의 비극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어둠과 빛의 예술, 영화

파벨만스 (The Fabelmans, 2022)

파벨만스 (The Fabelmans, 2022)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런 만큼 셀 수 없이 많은 탁월한 작품을 남긴 그이지만, 어쩐지 <파벨만스>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스필버그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자전적인 작품이라는 점도 특별하지만, 그 비밀스러운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꺼내 보이는 이 영화에서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가 보여주는 감독으로서의 성장기이자,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거장의 선언이기도 하다.


<파벨만스>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흥미롭다. 이 오프닝 시퀀스에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린 새미(마테오 조리언)는 자신의 부모님 버트(폴 다노)와 미치(미셸 윌리엄스)와 함께 생애 첫 극장 나들이를 앞두고 있다. 어둠이 무섭다며 극장에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새미를 설득하는 부모. 아버지 버트는 영화가 어떻게 기능하는 지를 설명한다. 그는 영화의 과학적 원리를 논리적으로 풀어내 아들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다. 반대로 그의 어머니 미치는 영화를 꿈으로 묘사한다. 그것도 좋은 꿈으로. 영화를 설명하는 두 인물의 극단에 선 설명을 통해 <파벨만스>는 처음부터 비극을 암시한다. 반대 성향의 버트와 미치는 좋은 부모일 수는 있지만, 좋은 부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삶의 비극을 예상케 하는 두 캐릭터의 대사. 그렇지만 이 대사는 모두 영화에 대한 정답이기도 하다. 초당 24프레임으로 보여지는 어둠과 빛으로부터 탄생한 ‘활동사진’은 우리가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꿈’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 삶의 비극이 영화라는 예술에 그대로 투영되지 않음을, 그리하여 그로 인해 영화라는 예술이 부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파벨만 가족이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세실 B. 드미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다. 그리고 새미는 기차 충돌 장면을 보면서 두 눈을 반짝인다. 새미가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된 첫 번째 순간. 왜 하필 기차 충돌 장면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기차’와 ‘충돌’로 나눠서 답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속 기차를 보고 있으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다. 카메라로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차의 모습을 담았던, 영화 예술의 ‘존재’를 알렸던 바로 그 영화. <지상 최대의 쇼> 속 기차 역시 <열차의 도착> 속 기차와 비슷한 구도를 띄며 카메라를 향해 질주한다. 차이는 충돌이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새미는 영화에 매료된다.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기차를 통해 영화의 존재를 이해한 새미는 충돌로 인해 스펙터클이 가미되는 순간 영화를 갈망하게 된다. 그렇게 스필버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존재 방식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예술이 삶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파벨만스>는 삶과 영화 사이에 놓인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사이에서 삶과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영화가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생명을 얻지만, 삶의 모습이 영화 안에 그대로 투영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삶의 사건들 중에서도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린 새미가 영화에 매료되는 순간은 기차가 움직이는 순간이 아니라, 충돌하는 순간이다. 버트는 충돌에 집착하는 아들의 모습에 의문을 가진다. 버트는 새미가 영화가 아닌 비극에 집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미는 그 영화 속 ‘비극’ 안에서 ‘스펙터클’을 발견한 것이다.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인 사건을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영화의 힘. 비극이 오락으로 변하는 마법. 그것이 영화가 삶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고, 결국 이것이 <파벨만스>가 말하는 핵심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빛(즐거움)과 어둠(비극)의 예술임을 강조하는 <파벨만스>의 태도 역시 인상적이다.



그 안에서 이 영화는 어느덧 자란 새미(가브리엘 라벨)가 영화 감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새미는 영화의 전반부에서 삶과 영화를 분리하지 않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삶이 즐거울 때 영화를 만든다. 그때 그의 영화에는 비극이란 없다. 그가 어머니와 만든 첫 번째 영화는 세실 B. 드미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영화와 사랑에 빠진 순간 탄생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극장에서 본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보고 탄생한다. 그리고 새미가 연출한 이 두 편의 영화 모두 그것을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며 성공한다. 그러나 즐거움으로부터 출발한 두 편의 영화가 모두에게 기쁨을 주고 새미 역시 만족시키며 성공한다는 설정은 다소 의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삶의 관점과 영화의 관점은 다르다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분명하다. 그 두 편의 영화는 새미의 진정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지상 최대의 쇼>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재현하는 것에 그친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영화는 새미의 진정한 영화가 아닌, 세실 B. 드미와 존 포드의 영화를 따라 한 모방작에 불과하다. 사실상 새미는 자신이 만든 두 편의 영화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진정한 작품이 아닌 이 두 편의 성공은 새미에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



문제는 이후 등장하는 영화에서 발생한다. 가족과의 캠핑을 담고 있는 영화와 아버지의 전쟁 영웅담을 소재로 만든 전쟁 영화가 그렇다. <파벨만스>는 새미가 이 두 편의 영화를 만드는 장면에서 새미의 확실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영화들은 앞선 모방작들과는 달리 새미의 영화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러나 두 편의 영화는 실패한다. 여기서 다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드러난다. 삶과 영화의 관계. 캠핑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미는 어머니의 불륜을 확인한다. 그리고 새미는 편집의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그 비극에 대한 통제를 시도한다. 그리고 캠핑 영화와 함께 제작된 전쟁 영화. 이 영화는 캠핑 영화와 달리 새미가 찍고 싶어 하던 영화다.


새미는 편집과 자신이 원하던 영화 자체를 통해 비극의 캠핑 영화를, 즉 자기 삶의 비극을 치유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쟁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새미는 베니(세스 로건)와 함께 먼저 떠나는 어머니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곳에 영화를 통한 치유는 없다. 그렇게 새미는 영화로 삶의 비극을 통제하는 것에 실패한다. 캠핑 영화에서의 편집은 그의 삶 속 비극을 완전히 발라내지 못했고, 전쟁 영화의 끝에서 목격한 장면 역시 결국 치유하지 못한 비극의 결과다. 삶에서 즐거움이 아닌 비극을 마주한 새미는 끝내 영화를 통해 삶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지 못하며 자신의 진정한 첫 영화에서 실패를 맛본다. 그리고 그는 영화를 포기한다. 아직 감독으로 성장하지 못한 새미는 즐거움 없이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삶과 다른 관점의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비극으로 가득 찬 영화를 견딜 수가 없다. 이에 더해 그는 애리조나를 떠나기 전 베니로부터 카메라를 선물 받는다. 카메라는 영화다. 그러나 베니는 새미에게 비극이다. 비극 각인된 영화. 새미는 영화를 바라보지 못하고, 갈망하지 못한다. 그렇게 감독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런 그는 LA로 이사를 와 여자 친구 모니카(클로이 이스트)를 만난 후에야 다시 영화를 찍는다. 인생의 즐거움을 다시 찾은 새미는 그녀의 제안에 따라 땡땡이의 날(Ditch Day)을 계기로 다시 카메라를 잡기로 마음먹는다. 만약 그가 자신의 즐거움만을 그 카메라에 담았다면 다시 영화 감독으로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로 자신을 괴롭힌, 다시 말해 또 다른 인생의 비극인 로건(샘 레흐너)을 담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그를 영웅처럼 만든다. 여기에는 오롯이 새미 자신의 의도가 담겨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비극을 피하지 않고 영화를 통해 정면으로 마주한 새미는 영화를 활용해 그 비극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한다. 그리고 상영되는 영화를 따분하게 바라보던 새미는 비로소 자신의 성공을 목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를 본 로건의 반응이다. 로건은 이 영화를 보고 수치심을 느낀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한다. 그렇게 새미는 영화라는 무기로 현실에서의 비극마저 완벽하게 치유한다. 그렇게 실패했던 감독 새미는 영화의 원리를 이해한다. 삶 속에서 우리는 비극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비극을 영화로 끌고 들어오면 관점의 전환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그렇게 새미는 감독으로 성장한다.



<파벨만스>는 영화 전체를 감싼 이야기와 결말로 다시 한번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결국 새미의 부모님은 이혼을 선택한다. 새미는 삶에서의 비극을 피해 가지 못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자신이 선망하던 존 포드(데이빗 린치)의 조언을 듣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새미의 희망찬 발걸음으로 끝이 난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자신의 비극을 영화를 마주했던 지난날의 희망으로 희석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그렇기에 극 중 존 포드의 조언 역시 의미심장하다. “지평선이 아래에 깔리거나, 위에 있으면 영화는 흥미롭지만, 중간에 있으면 재미가 없다”는 그의 말에 새미는 미소 짓는다. 지평선은 카메라가 담는 앵글, 즉 시선에 따라 결정된다. “영화는 삶에 대한 혹은 영화 자체에 대한 확실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간에 애매하게 걸친 관점으로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거장의 조언. 그리고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바뀌는 카메라 앵글을 통해 카메라의 존재와 존 포드의 조언을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인식시킨다. 그런 방식으로 비극을 통제하는 또 다른 거장 스필버그의 희망찬 확신과 함께 <파벨만스>는 끝이 난다. 영화란 삶의 비극을 희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어둠과 빛의 예술임을 증명하는 확신의 마침표. 이렇게 스필버그는 이 위대한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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