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Babylon, 2022)
바빌론 (Babylon, 2022)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탐 크루즈 주연의 <탑건: 매버릭>은 지난해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 <탑건> 이후 36년 만에 등장한 이 속편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그 열렬한 환호는 이 시대 마지막 ‘무비 스타’로 불리우는 탐 크루즈에게도 미쳤다. 아니 어쩌면 <탑건: 매버릭>에 대한 환호는 원래부터 탐 크루즈에 대한 환호였을지도 모른다. 36년의 세월을 관통한 탐 크루즈는 그런 환호 속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먼 훗날 또 한 번의 36년이 흘러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스타가 더 이상 새로운 <탑건>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탑건: 매버릭> 속 그의 빛나는 모습으로 그는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데미언 샤젤의 신작 <바빌론>은 그렇게 영화를 통해 영생을 얻은 이들, 그리고 반대로 그들로부터 영생을 얻은 영화에 대한 영화다.
<바빌론>은 데미언 샤젤이 띄우는 영화에 대한 연서(戀書)다. 그런 의미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와 닮아있기도 하다. 그러나 두 영화의 톤은 완전히 다르다. 타란티노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함을 잔뜩 품고 있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고전 할리우드 시대를 지나 뉴 할리우드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 속에서 잊혀져간 인물들을 애정을 담아 추억하고, 그를 통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반면, <바빌론>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를 비극으로 가득 찬 세계로 바라본다.
이 영화가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영화에서 <라라랜드>의 모습이 언뜻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느낌의 음악, 꿈을 향해 질주하는 인물들, 영화의 후반부 등장하는 꿈에 대한 꿈을 보여주는 장면까지, 이 영화는 <라라랜드>와 닮아있다. 그러나 멜로 영화의 틀 안에서 사랑스러웠던 <라라랜드>와 달리, 이 영화에 사랑스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30분이나 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며 배우가 되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라라랜드> 속 미아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애초에 임신으로 인해 하차하기 전까지 넬리 역할은 <라라랜드>에서 미아를 연기했던 엠마 스톤이 맡기로 돼 있던 사실에서 데미언 샤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며 스타로 거듭났지만, 이후 몰락하는 넬리의 모습은 “스타가 된 미아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게 해 <바빌로>을 <라라랜드>의 독한 후일담으로 만들어준다. 그렇게 이 영화는 <라라랜드>의 따뜻함을 차갑게 식히는 비극의 LA를 보여준다.
영화의 중반부 엘리노어 세인트 존(진 스마트)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대화 역시 이와 연결된다. 엘리노어는 자신을 찾아온 잭에게 그의 시간이 끝났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녀는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당신과 나, 그리고 이 대화가 반복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데미언 샤젤은 이 대사를 통해 <바빌론> 속 스타를 꿈꾸던 넬리는 <라라랜드> 속 스타를 꿈꾸던 미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신의 비극적인 톤을 활용해 자신의 고백을 더욱 절절하게 만든다. <바빌론>은 그런 비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런 세계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이런 너를 사랑한다는 가슴 절절한 고백, 그러나 비웃음을 사는 고백(영화 속 극장 안의 관객들은 한물간 스타 콘래드의 영화 속 사랑해라는 대사를 비웃는다.). 그 비웃음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무책임한 대답과 함께 그는 자신이 사랑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절절한 고백도 비웃음으로 만들어버리는 비정한 시대의 변화와 그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추한 LA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은 그런 영화와 그 시절을 사랑한다고 외친다.
그리하여 <바빌론>은 영화의 영원을 믿는 영화다.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져가 잊혀졌지만, 필름 안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그들로 인해, 그리고 그들의 영화를 향했던 지독한 사랑으로 인해 영화는 영원하다. 물론, 기어코 그들 역시 영화로부터 영생을 부여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비 간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 속 매혹적인 후반부 직전을 떠오르게 하는 마지막 순간으로 영화의 영생을 증명하려 한다. <지구 최후의 밤> 속 뤄홍우가 그랬듯, 이 영화의 매니(디에고 칼바) 또한 극장에 앉아 이윽고 잠이 들어 꿈을 꾼다(데미언 샤젤은 <라라랜드>에서도 꿈(혹은 상상)의 장면으로 영화를 황홀하게 매듭지은 바 있기에 더욱 이 장면은 흥미롭다). <바빌론>에서 매니는 두 스타인 콘래드와 넬리 사이의 관찰자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데미언 샤젤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난입할 틈을 매니를 통해 열어놓는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 꿈은 중요하다. 그의 마지막 시선(꿈)은 데미언 샤젤이 <바빌론>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비전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뤼미에르 형제의 ‘활동사진’과 최초의 SF 영화인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 세계 여행>을 지나, 고전 할리우드와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대를 거쳐, 제임스 카메론이 <터미네이터 2>로 열었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카메론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3D 영상 혁명을 보여준 <아바타>로 끝이 나는 가슴 벅찬 몽타주. 그리고 그 사이사이 곁들여진 <바빌론> 속 콘래드와 넬리의 빛나는 순간.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는 순간의 매니와 넬리의 모습까지. 영화의 역사와 <바빌론> 속 매니의 인생이 그 황홀하고 강렬한 마지막 몽타주 속 녹아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인생과 영화를 결합시키고, 영화의 숭고한 역사를 관객들의 인생에 녹여 그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렇게 추악하고 더럽게 묘사했던 그 시절과 영화를, 이런 내가 사랑하노라, 그리하여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노라 고백하며 마무리된다.
그동안, 앞서 언급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지구 최후의 밤>을 비롯해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코엔 형제의 <헤일, 시저!> 등 수많은 영화들이 영화를 예찬하며 그 영원함을 믿어왔다. 그리고 샤젤 역시 자신의 스타일 관찰 시키며 <바빌론>을 그 리스트에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바빌론>이 천의무봉에 가까운 영화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비극적 결말의 영화 속 강렬했던 마지막 몽타주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한동안 깊이 남아 있을 것 같다. <바빌론>은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본인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 일깨워 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를 통해 다시 고백한다. 이런 내가, 이런 너, 바로 영화를,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