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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더슈탄트 Nov 12. 2023

[페루] 01. 안데스 고원에서

 산티아고에서 페루로 가는 비행기는 대부분 수도 리마를 목적지로 합니다. 하지만 마침 산티아고를 떠나는 날, 주 3회 운항하는 쿠스코행 직항편이 있었습니다. 시간대도 적당해,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산티아고에서 환승 없이 편하게 쿠스코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칠레 산티아고의 해발 고도는 평균 500m 정도입니다. 이것도 평균 해발 고도가 50m 수준인 서울에 비해서는 높은 곳에 있는 편이죠.


 하지만 쿠스코의 고도는 그보다 훨씬 높습니다. 평균 고도가 3,500m에 달하죠. 백두산보다도 한참 높은 고도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가본 곳 가운데 가장 높은 고도였습니다.


 이런 곳에 비행기를 타고 급히 올라왔으니, 고산증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고산에 익숙해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올라왔다면 모르겠지만,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 고산증은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스코에 도착한 날 저녁부터 컨디션이 나빠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두통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차 한 잔을 곁들여 아침을 먹고 나니 증상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물을 충분히 마시며 쉬니 점심쯤에는 증상이 전부 사라지더군요. 고산에 익숙해질 시간을 위해 일부러 하루를 비워 두기도 했고요.


아르마스 광장


 여유 있게 일정을 잡은 덕에, 쿠스코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높은 경사를 따라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이 많았습니다. 오래된 역사의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고산증은 다 사라졌지만, 산소가 부족한 고산에서는 역시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숨이 찹니다. 계단과 경사로가 많은 쿠스코에서는 그래서 걸음을 더 천천히 해야 했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걷다가 어느새 나타나는 넓은 광장의 모습은 며칠을 지나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쿠스코는 옛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잉카 제국을 만든 잉카 족은 오래전부터 쿠스코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죠. 그랬던 이들이 12세기 쿠스코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이 15세기 주변 지역으로 팽창하며 만든 것이 잉카 제국입니다.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출발부터 끝을 함께한 도시였습니다. 잉카 제국의 전성기에는 남미 대륙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였죠. 잉카 제국은 쿠스코를 중심으로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 에콰도르, 칠레 북부까지 장악한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잉카 제국의 신전이었던 코리칸차 터. 현재는 산토 도밍고 성당이 지어져 있다.


 잉카 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찾아온 스페인 정복자들은 멸망의 불씨를 당겼죠. 유럽인은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보다 더 강력한 병원균을 데리고 왔습니다. 천연두를 비롯한 전염병의 확산으로 잉카 제국은 안에서부터 무너졌습니다.


 스페인의 정복자였던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겨우 몇백 명의 병력으로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쿠스코 역시 스페인의 손에 떨어졌죠. 잉카 제국의 후예들은 쿠스코를 떠나 신잉카 제국을 세우고 저항했습니다. 신잉카 제국은 한때 쿠스코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30여 년 만에 멸망했습니다.


 이런 전란의 역사를 겪은 탓에, 지금 쿠스코에는 잉카 제국 시절의 건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만들어졌던 벽이나 도시 구조 정도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일까요. 오히려 쿠스코 시내의 중심에는 스페인이 만든 가톨릭 성당이 거대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쿠스코 대성당


 그래서 잉카 건축의 정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쿠스코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가야 합니다. 쿠스코에서 버스와 기차를 타고 세 시간, 그 길의 끝에 마추픽추가 있습니다.


 마추픽추는 잉카 제국의 전성기가 시작된 15세기 무렵에 지어진 건축물입니다. 잉카 제국 황제가 잠시 거주하는 별장이나 요새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죠.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 합니다. 하지만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는 가격도 높고, 지금은 철도가 수리 중이더군요. 저는 다른 많은 여행자처럼 인근 도시인 오얀타이탐보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거기서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로 향했습니다.


 기차는 좁은 협곡을 따라 이어집니다. 철도의 폭도 아주 좁게 느껴졌습니다. 확인해 보니 궤간은 914mm였습니다. 보통 사용하는 1,435mm 궤간의 3분의 2도 안 되는 폭입니다. 그만큼 급하고 험한 구간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지요.


페루레일


 기차역에 내려서 높은 마추픽추 봉우리까지는 또 한참을 올라가야 합니다. 버스로 아슬아슬한 길을 올라가야 하죠. 그렇게 산을 타고 오르면 깎아지르는 절벽 위에 지어진 도시가 나타납니다.


 이곳에 어떻게 자재를 옮기고 건물을 올렸는지, 그리고 사람이 살아갔는지 신기할 정도로 급한 경사였습니다. 주변 봉우리도 높게 솟아 있었죠. 옅은 비가 오는 날씨, 구름과 같은 높이에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실제로도 마추픽추는 관리하기 어려운 요새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길과 논은 쓸려 내려가기 일쑤였고, 식량도 자급하지는 못했다고 하니까요. 잉카 제국이 몰락하자 마추픽추는 버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졌죠.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마추픽추는 ‘정복자’들의 훼손과 파괴를 피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많은 관광객이 그 험준한 산속으로 기차와 버스를 타고 오르고 있습니다.


마추픽추


 마추픽추에서는 잉카 제국이 구가한 영광의 시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미 대륙에서 가장 번성했던 국가는 그 흔적을 역사의 도시에 남기고 있었습니다.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잉카 제국은 후발 주자였습니다. ‘늦은 제국’이었죠. 잉카 제국에는 문자도 없었고, 철기도 없었습니다. 바퀴도 발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잉카 제국은 ‘다른 제국’이기도 했습니다. 석재를 이용한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죠. 천문학에 관한 지식도 해박했고, 태양력을 기반으로 정교한 달력도 만들었습니다.


 험준한 안데스 산맥에서 어차피 바퀴는 쓸모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대신 잉카 제국은 산과 산을 잇는 촘촘한 도로망과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잉카 제국은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영광의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마추픽추


 유럽과 ‘구대륙’의 사람들에게 잉카라는 ‘신대륙’의 문명은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대륙’을 만난 16세기의 ‘구대륙’은 그 다름에 파괴와 식민으로 응대했습니다.


 지금도 남미라는 ’신대륙‘은 우리와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지구 반대편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죠. 한국과 페루 사이에는 열 네시간의 시차보다 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신대륙‘을 만나는 ’구대륙‘의 모습은, 16세기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을까요. 이제는 서로의 다름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마추픽추로 향하는 기차는 ‘페루 레일’과 ‘잉카 레일’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합니다. 이 중 ‘페루 레일’이 더 크고 오래된 회사죠. 이 회사는 페루와 유럽 자본이 절반씩 합작해 만든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지분 절반을 벨몬드 사가 가지고 있고, 벨몬드 사의 모회사가 ‘루이비통 모에헤네시 그룹’입니다.


 오늘도 협곡을 따라 좁은 기찻길에는 두 세계가 함께 만든 기차가 오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두 세계의 자본이 바다를 건너 마주하고 있습니다.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차는 고원에서도 그 모습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추픽추의 거친 봉우리는 ‘구대륙’의 손을 피해 파괴되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구대륙’과 함께 만든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로 향합니다.


 마추픽추에서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렇게 두 세계가 함께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결론을 상상해 봅니다. 우리 시대는 그럴 수 있을 만큼의 진보를 이루어 낸 것일까요. 차창 밖으로 멀리 쿠스코 중심의 높은 성당이 보일 때, 고민은 더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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