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적도를 넘었습니다. 페루 리마를 거쳐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것은 이른 오후였습니다. 짧았던 남미 여행을 마치고 이제 파나마 북쪽의 북미로 넘어온 것입니다.
북미에 오기는 했지만, 사실 저는 큰 변화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멕시코 역시 라틴아메리카라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이는 국가니까요. 남미의 여느 국가들처럼 멕시코도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숙소로 들어오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모습이 분명히 달라져 있었거든요. 맥도날드나 세븐일레븐을 비롯한 미국계 프랜차이즈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창고형 대형마트도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짙게 느껴졌다고 할 수도 있겠죠.
멕시코는 미국과 3,145km 길이의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국경이 바로 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이라고 하죠. 그런 만큼 멕시코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멕시코는 ‘새로운 스페인’이라는 의미로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라고 불렸습니다. 나폴레옹 혁명과 함께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자 이 누에바 에스퍄나도 다른 남미 식민지와 함께 독립 전쟁에 뛰어들죠.
1821년 누에바 에스파냐는 멕시코 제국으로 독립했습니다. 당시 멕시코의 땅은 지금 미국의 텍사스 주, 뉴멕시코 주, 캘리포니아 주는 물론 파나마 이북의 중앙아메리카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아메리카 지역이 멕시코에서 탈퇴하는 것은 2년 뒤인 1823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다시피, 그 뒤로 멕시코의 역사는 미국과의 끝없는 분쟁이었습니다.
1824년 멕시코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됩니다. 이때 멕시코의 공식 국호는 ‘멕시코 합중국(Estados Unidos Mexicanos)’이 됩니다. 다분히 ‘미합중국(스페인어로는 Estados Unidos)’을 의식한 것이었죠. 헌법이나 정부의 형태도 미국과 아주 유사했습니다.
이후 멕시코 현대사의 격랑을 따라 멕시코의 공식 국호가 바뀌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도 멕시코의 공식 국호는 ‘멕시코 합중국’입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이런 긍정적인 영향만 오간 것은 아니었죠. 1836년에는 텍사스 주가 멕시코에서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845년 미국에 가입했죠. 1846년, 미국은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며 멕시코를 침공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뉴멕시코를 비롯한 막대한 영토가 미국에 편입됐습니다. 텍사스 독립부터 미국과의 전쟁까지, 멕시코가 10여 년 만에 잃어버린 땅은 전체 영토의 절반을 넘는 땅이었습니다.
영토 상실의 상처는 전쟁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죠.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각지에서 정부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죠. 쿠데타를 비롯한 정권 전복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을 바로잡겠다며 등장한 지도자가 군인 출신인 포르피리오 디아스였습니다. 1876년 집권한 그는 수 차례 헌법 개정을 통해 1911년까지 35년 동안 멕시코를 지배했습니다.
디아스는 전형적인 개발독재형 정치인이었습니다. 기업인과 대농장주에게 힘을 실어주며 경제를 성장시키고자 했죠. 외자 유치를 통한 인프라 투자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노동자와 농민, 특히 원주민에 대한 인권 탄압이 있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결국 장기 독재에 지친 멕시코의 국민들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1910년부터 혁명군이 꾸려져 디아스 정권에 대한 전쟁을 벌였죠.
언급했듯 디아스 대통령은 1911년 퇴임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끝나지 않았죠. 혁명 세력이었던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2년 만에 쿠데타와 암살로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다시 전쟁과 혼란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혁명은 1920년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됩니다. 혁명 세력 안에도 내분이 발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920년 혁명 세력의 일원이었던 알바로 오브레곤이 대통령에 오릅니다. 이후에도 산발적인 혼란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멕시코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죠.
혁명 세력이 규합되어 만든 ‘제도혁명당’은 2000년까지 70년 넘는 기간 장기 집권했습니다. 그 사이 토지 개혁과 노동조합의 강화, 원주민 인권 보호, 석유 채굴권의 국유화 등 여러 좌파적인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제가 잠깐의 여행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멕시코에게 미국의 그림자는 짙었습니다. 그것은 꼭 도시의 경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멕시코의 현대사에서는 미국과의 경쟁과 협조가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었죠. 혁명과 제도혁명당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역사도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이 만든 긴 그림자였습니다.
하지만 멕시코의 역사는 미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미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혁명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좌파 세력의 장기 집권이 있었습니다.
멕시코의 현대사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멕시코의 인구는 1억 2천만 명을 넘지만, 총 GDP는 한국보다도 낮습니다. 멕시코시티 외곽으로 나갈수록 낙후된 골목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북부에는 치안 문제도 심각합니다. 미국으로 향하는 미등록 입국자 문제도 여전합니다. 혁명 세력을 계승한 제도혁명당도 장기 집권이 이어지며 권위주의적으로 변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정권을 상실했죠.
하지만 멕시코의 시민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나가려 애썼습니다. 여전히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그림자 속에 있지만, 그 그림자 안에서도 다른 면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혁명 이후 멕시코 정치의 역할이었습니다.
당장 미국과 달리 멕시코 정치에는 다당제가 안착해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촘촘한 여성 할당제를 통해, 2018년에는 세계 최초로 상원의원의 여성 비율이 절반을 넘기도 했죠. 지금도 여성 의원의 비율이 30%가 안 되는 미국에 비해, 멕시코 의회의 여성 비율은 50%에 가깝습니다.
아직 미국은 여성 대통령을 내지 못했지만, 멕시코는 내년 대선에서 주요 양당이 모두 여성 후보를 대통령에 공천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내년에는 멕시코에 여성 대통령이 처음 탄생합니다.
세계의 혁명가들이 멕시코에 자리를 잡고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쿠바 혁명을 일으킨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를 향해 출항한 곳도 바로 멕시코였습니다. 스탈린에게 축출된 소련의 레프 트로츠키도 결국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자리를 잡았죠.
멕시코에서 사망하기 며칠 전, 트로츠키는 유언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쩌면 멕시코가 그 현대사를 통해 꾼 꿈을, 성패와 관계없이 이 한 문장이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 1940년 2월 27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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