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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더슈탄트 Jan 26. 2024

[일본] 19. 서쪽의 섬

 일본 열도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동남쪽으로는 태평양에 접해 있고, 서북쪽에는 동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일본의 동북쪽으로 가면 홋카이도를 넘어 사할린과 시베리아 동토입니다. 태평양으로도, 시베리아로도 오랜 기간 외부 세력은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섬나라라는 점에서 흔히 영국과 비교됩니다. 하지만 영국과 유럽 대륙을 잇는 도버 해협은 40km 정도에 불과합니다. 반면 대한해협은 200km에 달하죠.


 덕분에 일본은 오랜 기간 외부 문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권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도 외부인의 침입이 쉽지 않았으니까요.


규슈의 바다


 그 가운데 그나마 외부와 가까운 땅은 서남쪽의 섬 규슈입니다. 태평양에서 미국이, 시베리아에서 러시아가 나타나기 전에는 사실상 유일한 외부와의 소통 창구였죠.


 제가 도착한 후쿠오카는 한국과의 교류가 지금까지도 활발한 도시입니다. 부산과 후쿠오카를 오가는 배편도 활발하게 운항하고 있죠. 덕분에 많은 한국인이 여행하고 또 체류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특히 북규슈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깊게 교류한 지역입니다. 물론 항해가 쉽지는 않았지만, 교역과 접촉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거의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전국시대가 그랬습니다. 1467년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불타며 중앙 세력의 통제력은 사라졌습니다. 지방으로 흩어진 무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력권을 구축하기 시작했죠.


 중앙의 통제가 사라지면서, 규슈의 영주들은 더 쉽게 외부 세계와 접촉했습니다. 중국과 조선은 물론, 동방으로 진출하고 있던 서양 세력과도 만났습니다.


 이 시기 많은 수의 일본인들이 규슈를 통해 해외로 넘어갔습니다. 누군가는 무역을 했고, 누군가는 ‘왜구’라 불리며 해적이 되었죠. 둘 사이의 경계가 그리 뚜렷하지도 않았습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무역에 종사하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은 막대한 은 생산량을 기반으로, 유럽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세계 무역 네트워크의 일원이 됐습니다.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


 일본이 내어준 것이 은이었다면, 일본이 받아온 것도 있었겠죠. 끝없는 전란의 시대, 일본으로 들어온 것은 무기와 종교였습니다.


 일본에 총이 처음 전래된 것은, 규슈 인근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서였습니다. 이후 이 총을 복제해 제작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국시대 전쟁의 패러다임은 크게 바뀌죠.


 과장된 면은 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집권이나 조일전쟁 초기 일본의 승전에도 총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죠.


 전란에 시달리는 민중들에게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가 확산됐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인도에서 일본인을 만났고, 그를 길잡이로 삼아 1549년 규슈에 상륙했습니다.


 기독교는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세를 키워나갔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해 기독교를 믿는 영주들도 생겨났죠. 선교사를 따라 로마까지 건너간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하지만 일본에도 곧 통일된 정권이 세워집니다. 통일 정권은 규슈를 비롯한 지방 세력이 외국과 독자적으로 교류하는 것을 원치 않았죠. 내부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한 뒤, 일본에서 기독교는 금지됩니다. 에도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죠. 선교사는 쫓겨났고, 모든 사람들이 절에 신자로 등록해야 했습니다.


 1637년에는 이에 반발한 기독교도의 반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몇 달 만에 진압됐습니다. 기독교도에 대한 처형이 이어졌죠.


 외부와의 무역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에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사무역은 금지됐고, 먼 바다에 나갈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습니다.


 총포 기술도 당연히 더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전쟁의 시대는 갔으니까요. 다른 무기에 비해 장기간의 수련이 필요 없는 총은 무사의 권위를 높이는 데도 적절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본에는 ‘쇄국’의 시대가 왔습니다.


기독교 반란이 일어났던 시마바라 성


 하지만 그 ‘쇄국’의 시대에도, 규슈의 역할은 특수했습니다.


 흔히 ‘쇄국’ 정책에도 ‘네 개의 창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북쪽 마쓰마에 번은 홋카이도 아이누와 교역했습니다. 쓰시마는 조선과 교류했죠. 나가사키는 중국이나 네덜란드와 무역을 했고, 가고시마는 오키나와와 교류했습니다.


 이 ‘네 개의 창구‘ 가운데 나가사키와 가고시마는 규슈에 있습니다. 쓰시마 역시 현재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으니, 규슈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아이누와의 교역을 제외하고, 다른 문화권과의 접촉은 사실상 규슈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셈입니다. 규슈는 그만큼 특별한 곳이었죠.


네덜란드와 교역하던 나가사키 데지마


 특히 네덜란드와 무역한 나가사키의 역할은 특수했습니다. ‘쇄국’의 시기, 나가사키는 서양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틈이었으니까요.


 서양과의 무역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 교환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상관은 서양 각국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막부에 제공해 주었죠.


 1853년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러 배를 보냈을 때, 막부는 네덜란드를 통해 이 사실을 미리 확인했습니다. 미국의 함대가 어디까지 왔는지도 추적하고 있었죠. 개항 요구 이후 막부의 기민한 대응은 그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나가사키에는 기독교인도 많았습니다. 물론 탄압이 심하니, 신앙을 숨기고 살았죠.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라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떠났지만, 기독교인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예배를 드리거나 서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상은 관음상이라 속였습니다.


 서양의 선교사들은 300여 년 뒤,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나가사키에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몰래 믿고 있었죠.


 300년간 자생적으로 유지되어 온 기독교 집단을 서양 선교사들이 ‘발견’한 사건은, 가톨릭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 박해로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명이 성인으로 시성되기도 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순교해 복자로 시복된 이들 가운데에는 조선인도 있었습니다. 나가사키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고, 규슈는 조선과 가까워 조일전쟁에서 납치된 전쟁 포로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끝내 타지에서 순교한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규슈의 나가사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죠.


관음상으로 위장한 성모 마리아상


 규슈는 서쪽의 섬입니다. 에도의 무인 정권은 물론, 교토의 귀족들보다도 더 서쪽에 있던 땅입니다.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사실입니다. 서쪽에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독특한 풍경이 있었으니까요.


 동북쪽에서 출발해 서남쪽으로 향하는 이 여행에서, 규슈라는 섬이 인상깊게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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