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잉위잉 Jul 10. 2016

정신적 왼손잡이#31.쉬어가기

20160630.#31.쉬어가기

#1. 비우기


마지막 근무일. 고작 계약직으로 10개월 일했을 뿐인데 짐이 제법 많았다. 여차 저차 한 사정으로 기기 지급이 어려워 내가 집에서 쓰던 27인치 QHD 모니터를 회사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이전 부서에 있을 때부터 편집했던 잡지와 서류를 모으니 A4용지 박스에 빼곡히 들어찼다. 파티션에 덕지덕지 붙여 두었던 각종 메모와 명함도 떼어냈다.


회사 공공비용으로 구매했던 문구류 중에 멀쩡한 것들은 5월에 입사한 신입 에디터님께, 내가 샀지만 도저히 둘 곳도 쓸 데도 없어진 책상 정리대는 부사수님께 양도했다. 겨울 근무 때 쓰던 무릎담요부터 등허리를 두들기던 안마봉, 쉬는 시간에 베고 자던 인형,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서 선물 받은 티백 커피 등 자잘한 것들을 몇 주간에 걸쳐 집에 가져갔다. 집에 가져가 놓고선, 그대로 내팽개쳐두고 정리하지 않았다. 집은-7평 남짓한 자취방은 아수라장이다.


컴퓨터와 모니터 설정만 맞추고 나동그라졌다. 할 일은 있지만 도저히 할 의욕이 들지 않았다. 벌렁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만졌다. 온갖 심란한 소식으로 가득한 SNS를 들여다보다가 태블릿으로 만화를 틀었다. 그걸 보다가 잠들었다. 고작 모니터 하나 옮겨왔을 뿐인데, (게다가 너무 무겁고 커서 택시를 탔는데도) 팔다리를 들어 올릴 기운도 없었다.


쓸데가 있어서 그린 내 집의 일부. 사실 여기에 온갖 잡동사니와 옷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게 현실.

집을 치우는 일도 버겁다. 그렇다고 누가 내 물건을 만지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무력한 내가 내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봐 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응원이 되는 사람이 있을지가 관건이지만.



#2. 옹졸함


선물을 받았다. 수고했다는 인사와 감사를 받았다. 술잔도 많이 받았다. 예쁨과 칭찬도 받았다. 제대로 내가 받아 섬기지를 못했을 뿐이지 회사 사람들은 나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했다. 그 와중에도 서운했던 것, 힘들었던 것만 떠올라서 몇 번이고 술잔을 움켜쥐었다. 그게 입 밖으로 나와버릴까 싶을 때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따라 나와서 바람을 쏘이는 척 무릎을 껴안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잘 되진 않았다. 뒷마무리는 그리 깔끔하지 못했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아니면 화가 난 부분이 있다면 정말 딱 부러지게 화를 낼걸.


속이 너무 쓰리고 답답해서 어디에라도 털어놓고 싶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잘 들어보라고,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냐고...


"더 말하지 마. 이제 끝났어."


라고, 괴물 같은 내가 나타나서 구질구질하게 헤매는 나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업무 메신저를 지웠다. 내가 없는 곳에서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며 지낼까. 두 번 다신 가까운 시일 내로 연락하지 않을 것만 같은 어색함만 남았다. 회사는 그런 곳이라고 했지만 난 '그래도, 그래도'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괴물의 나는 그런 어린 나의 머리채를 잡아 집으로 묵묵히 끌고 갔다.



#3.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위잉씨. 우리 계속 봐요."


사수님과 부사수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특히 사수님은 나와 4년 전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나는 당장 내일도 모레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는 비관주의자라, 속으로 '네. 제가 죽지 않는다면 계속 봐요.'라고 답하고 있었지만...


... 반가운 말이었다. 미디어 계열에서 언젠가 다시 마주칠 사람임을 알고 있다. 슬프게도 난 스스로 인연을 잘 이어가는 사람은 아니다(악연도 잘 못 끊는 편) 일하면서 이러저러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이끌어준 사람들이다. 어째서 나는 더 웃어주지 못하고,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차가웠어야 했을까.


이미 말은 쏟았다. 바쁜 삶 속에서 그 말의 자국이 잊히기를 바랄 뿐이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 이적의 <걱정 말아요, 그대>가 흘러나온다. 고음역으로 그가 외치듯 부르는 가사가 또 마음을 흔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회사가 있는 종로 대로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얼얼할 것이다. 새 직장을 구해서 머릿속에 업무로 가득 차기 전까지, 버스에서 졸거나 태블릿을 들여다볼 만큼 바빠지기 전까진.


근무 수료증과 선물을 내려놓고 샤워를 마쳤다. 다음 직장을 고민하지 말고 우선은 쉬기로 했다. 모처럼 맥주도 한 캔 마시고, 보고 싶었던 방송도 틀었다.

이대로 이불 속으로, 마구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기나긴 일 끝에 쉬는 것. 그간 내가 뭘 했나를 생각해보면 잠이 들기 좋게 나른해진다. 이 무수함 역시 한 이틀 가까이를 생각 없이 쉬고 나면 금세 잊고 말 것임도 안다. 



※7월 2일~5일까지,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다녀와도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제 본성인가봅니다. 차차 글 쓰겠습니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적 왼손잡이#30.사회인 실격(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