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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스키 Oct 25. 2020

#1. 글씨 예쁜 게 대체 왜 장점이죠?

손글씨 잘 쓰는 남자

장점이요? 위스키님 글씨 되게 잘 쓰시잖아요.


  대학생 때부터 내가 나의 장점이 뭔지를 모르겠다고 넋두리하듯이 얘기하면 이런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많다. 이게 빈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던 편이다.


 회의나 강의에서 필기를 많이 하다 보니 '글씨가 되게 예쁘다'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어느 순간 지루해서 딴생각을 하며 두리번두리번거리다 보면 내가 열심히 적고 있는 노트가 보이나 보다. 손을 한 시도 쉬지 못하는 성향이라 나중에 다시 보지 않을 메모를 계속 주르륵 적고 있으면 손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별 이야기하는 거 같지 않은데 뭘 저렇게 많이 적나 의아해하며 쳐다보는 것일 수도 있다. 빈말 같은 칭찬거리를 던져준 거라고 생각도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글씨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딱히 피나는 노력을 한 건 없는데 글씨체가 예쁘게 생긴 것은 복이라고 생각은 한다. 내 성별이 남자이기 때문에 유독 부각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글씨를 잘 쓰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한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글씨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쓸 줄 아는 건데 그 형태가 조금 바르다고 해서 장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씨체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까.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글씨를 잘 쓰는 게 어떻게 장점이 될까 싶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의 장점은 착하고 노래 잘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내 주장은 아니고 실제로 어린이 중창대회에도 나갔었다.) 위기는 변성기 때 찾아왔다. 노래를 잘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신체적 변화 때문에 한 순간에 사라졌다. 달라지고 있는 목소리를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몰랐던 사춘기 소년은 더 이상 초등학교 때 그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는 더 이상 노래를 잘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게 됐다. 중학교 때는 딱히 공부를 압도적으로 잘하지도 그렇다고 밑바닥을 깔아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딱히 싸움을 엄청 잘하지도 않는데 딱히 엄청 맞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남중에서의 나는 장점이라는 것을 스스로 찾을 수 없는 까까머리 아기돼지에 불과했다. 그렇게 무난하게 살아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내가 생각보다 손글씨라는 것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 2가지 계기가 있다.


 첫 번째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은 중 2 때 덥수룩한 머리를 가지고 계셨던 OHP 마니아 국어 선생님이었다. OHP가 뭐냐고? (라테 월드 같지만) 내가 중 2 때 만해도 아직은 각 교실에 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던 시절이다. 그래서 '시청각 자료'라는 게 매우 부족한 시대였는데 그때 선생님들이 매우 많이 쓰시던 OHP라는 게 있었다.


OHP는 전용 필름에다가 인쇄를 하거나 손으로 글씨를 쓰면 그것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워주는 투영 장치다.

 컴퓨터에서 슬라이드 쇼를 보여주기 위해서 전용 프로그램이 필요하듯 OHP 전용 프로그램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OHP 필름이라고 불렀다.  OHP 필름에 A4용지처럼 프린트를 하거나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스크린에 운다.  국어 선생님이 OHP 마니아였던 이유는 신문물을 즐겨 쓰는 얼리어답터 여서가 아니라 그냥 칠판 글씨를 쓰기 매우 귀찮아서 자료 띄워주고  시간 동안 대충 읽어주기만 하길 좋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게으른 사람이 OHP 필름 자료 만드는   얼마나 귀찮았을까. 그래서   별로 자신의 OHP 필름 자료를 만드는 학생을 강제로 뽑아서 자신이 대충 프린트해  문서를 그대로 OHP 손글씨로 옮겨 적게 했다. 노트 필기 글씨가 남자치고 괜찮다는 이유로 나는 그중  명으로 뽑혔다. 나름 필름 용지라 네임펜으로만 글씨를   있었기 때문에,  돈으로 네임펜을 사서  학기를 OHP 필름 공장처럼 일을 했다. 처음에야 공부를 먼저 한다는 마음 가짐으로 시작했지만   정도 지나니까 이제는 거의 영혼 없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로봇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친구는  팔이 마치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잉크를 뿌려대는 잉크젯 프린트의  분무기 같다며 놀리기도 했다. 그때 받거나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네가  애들 중에 OHP 제일 보기 좋게  쓰네'라는  마디는 남았다. (근데 오래 지나서 알았지만 모든 학생들한테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때쯤 내가 글씨를  쓰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할  있었겠지만 너무 어려서였는지 '괜히 글씨  써서 귀찮기만 하네'라는 생각뿐이었다.


 두 번째 계기는 고1 때 첫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났을 때다. 만난 지 이틀 째 되는 날 일과를 마무리하고 청소를 하려는 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너 혹시 학급 서기 안 해볼래?"

"학급 서기요? 그게 뭔데요?"


 학급 서기는  '학급일지'라는 중요한 문서를 매일 기록하고 관리하는 담당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수락했다. 중학교 때 까지야 남중이라 딱히 무언갈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지만 남녀공학이었던 고등학교에서는 내 이름에 공식적인 어떠한 직책이라도 붙게 되면 달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주제랑은 조금 벗어나지만 학급 서기의 일은 생각보다 부지런해야 했다. 매일 아침과 오후 시간 학급일지를 교무실에 왔다 갔다 하며 챙기고, 중요한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이테크 씨 0.3mm 볼펜에 집착하게 된 것도 학급일지가 도저히 0.5mm 이상되는 볼펜으로는 그 빈칸을 채울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챕터에서 따로 이야기해야겠다.) 부지런히 학급일지를 작성하던 2개월 정도 되었을 때, 문득 왜 나였을까 궁금해졌다. 참 빨리도 생긴 의문이었다.


"선생님 근데 왜 저한테 서기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 선생님의 답변은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손으로 써서 제출한 개인 신상기록부를 쭈욱 보고 나서 글씨를 깔끔하게 잘 쓰는 학생 3명이 눈에 띄었었다. 아직 이름이 낯익지 않을 때라 둘째 날 수업을 시작하기 전 그 3명을 유심히 지켜봤다고 한다.


"(그렇게 3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딱 봤는데 반장해야 될 것 같았고, 또 한 명은 너무 잘 놀게 생겨서 말을 안 들을 것 같더라고. 근데 널 딱 보니까 딱히 학급 임원 할 것 같진 않은데 사고를 칠 것 같게 생기지도 않았더라고. 그래서 뽑았지."


 이런 걸 짬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면 관상은 과학인 건가. 실제로 그중 한 명은 반장이 되었고, 한 명은 우리 학교 유명 일진 중 한 명이 되었다. 아무튼 나는 나의 능력과 편안한 인상을 활용해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생애 첫 번째 면접을 무사히 통과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작한 학급 서기였지만, 경력자 타이틀 덕분에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급 서기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 3년 동안 나 혼자서 대충 쓰던 손글씨를 줄과 간격에 맞추어 공식 기록의 형태로 작성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후배들에게 내가 기록한 학급일지를 가지고 잘 기록한 사례로 교육하기도 했고, 내가 B4용지에 정리한 수업 요약 내용이 공식 채택되어서 모든 반에 부교재로 배포된 적도 있었다. 이 쯤되면 손글씨로 뭐 하나라도 이뤘을 법 싶다. 하지만 실컷 정리한 수업 요약은 오랜 기간 유지되던 '전교 1등은 여학생'이라는 대기록을 깨부수는 데 기여했을 뿐 내 성적은 달라진 게 없었고, 손글씨 학과라는 것도 없다 보니 학급 서기라는 스펙으로 갈 수 있는 대학교는 없었다.


 이런 경험들로 손글씨를 잘 쓰는 것은 결국 나의 고생을 늘려준 특성일 뿐이지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장점은 아니었다는 것이 여태까지의 결론이었다. 하물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손글씨를 잘 쓴다는 걸 장점으로 생각하기는 무리가 아닐까.


-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다음 이야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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