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초연을 시작으로 17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으며 무대에 오르고 있는 2인극 뮤지컬 ‘쓰릴 미’. 1920년대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던 전대미문의 유괴 살인사건을 뮤지컬화한 작품인데요. 김무열, 지창욱, 강하늘 등 지금은 톱스타로 성장한 인기 배우들이 거쳐 간 작품이라는 것이 알려지며 신인 등용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매 시즌 ‘쓰릴 미’의 캐스팅 소식은 새로운 뮤지컬 스타의 탄생을 기대하게 하는데요. 새로운 무대와 연출로 돌아온 이번 시즌에서 2년 만에 또다시 ‘그’ 역을 맡으며 깊어진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황휘인데요. 데뷔 4년 차를 맞이하며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시죠. (해당 기사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Q. 지난 2022년 시즌 ‘쓰릴 미’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배우로서 더 성숙해진 만큼 대본을 보며 새롭게 보인 점도 많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이번 프로덕션에서 연출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게 두 사람의 관계성이었거든요. 그걸 키워드로 잡고 대본을 다시 분석하는데, 그(이하 리차드)에겐 사랑의 형태가 달랐던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범죄지만 이 친구라면 꼭 함께 할 거라는 믿음 같은 거랄까요? 그런 마음으로 연기하다 보니 이번 시즌에는 상대를 더 많이 보고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내가 보지 않더라도 이 친구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따라오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되고요. (‘사랑의 형태’가 다르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형태일까요?) 애증일 수도 있고요. 집착과 정복의 욕구, 일종의 소유욕일 수도 있고요. 분명한 건 아름답지는 않은 형태라고 생각해요. 서로를 피 말리게 하는 그런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요.
Q. 이번 시즌에는 무대와 의상, 동선 등이 많이 바뀌기도 했는데요. 준비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무대와 의상 등의 변화도 크지만, 일단 초반 두 사람 사이 힘의 구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단 점이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동등한 에너지에서 시작해 보기로 했거든요. 후반부 반전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큰 작품이다 보니, 관객들에게 임팩트를 주기 위해선 단순히 관계의 전복을 넘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동등한 에너지 안에서 어떻게 섬세한 연기로 객석에 긴장감을 줄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요.
Q.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배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은 것도 ‘쓰릴 미’만의 장점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정말 좋죠. 사실 22년도에 '쓰릴 미’를 연기했을 땐 재미보단 벅찬 마음이 더 컸어요. 근데 이번 시즌을 하면서 인간 황휘의 결과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할 때 느끼는 쾌감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어요. 이전까진 어렵고 스트레스받는 일이라고만 생각했거든요. 무대 위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며 평소에 쓰지 않는 감정을 표출하는데, 가끔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웃음) 배우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 연기를 할 때 캐릭터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네, 저와 결이 맞는 캐릭터들도 좋지만, 결이 다른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 느끼는 재미를 알았으니까요. 더 다양한 배역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Q. 서사를 부여할 수조차 없는 악인을 연기하는 게 배우로선 힘든 일일 것 같아요. 보통 캐릭터를 연기할 땐 인물을 분석하고 스스로 납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맞아요. 실화를 소재로 하기도 했고요. 관객들에게 절대 어떤 공감을 바라고 연기할 수 없는 인물이죠. 근데 사실 악인은 본인이 악인이라고 생각을 안 하잖아요. 물론 이 인물에 대해서 파보려고 해도 납득이 갈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지만, 연기하면서 힌트를 얻은 건 ‘결핍’이란 키워드 같아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가정 내에서의 결핍, 본인의 기질 등이 얽히고설켜서 최악의 내면이 만들어 진 게 아닐까 싶어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니 그냥 무대에서 느껴지는 충동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던지면서 교감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면 시너지가 나올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거든요.
Q. 리차드는 갈수록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며 그 안에서 자극을 쫓잖아요. 그에게 자극의 끝, 결말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저도 리차드를 연기하면서 그에겐 살인이 절대 끝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나’(이하 네이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브레이크가 걸린 것뿐이었던 거죠. 그럼 ‘그가 도대체 살인을 넘어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때, 대본을 기반으로 추측해 본다면 조커처럼 도시를 박살내고 불바다로 만드는 큰 범죄까지 저질렀을 것 같아요. ‘Superior’라는 넘버 가사에서 ‘이 도시를 박살낼거야’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론 진짜 끔찍한 생각이지만 ‘네이슨을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들었어요. 이 친구를 소유하고,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할 때 만족감이 큰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게 안 될 때는 어떤 짓을 할지도 모르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Q. 인간 황휘로서 바라봤을 때 연기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던 장면이 있나요?
모든 장면이 다 그렇긴 하죠. 이들의 범죄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살펴보자면, 결국엔 리차드가 네이슨을 배신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런 순간에도 가끔 ‘네이슨이 정말로 리차드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게 무대에서 확 느껴질 때가 있어요. 물론 나 역(네이슨) 배우들의 노선,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느껴지는 세기가 다르긴 한데요. 정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난 진짜 널 위해서 이 짓까지 함께 했어’라는 에너지를 갖고 저를 보면 인간 황휘로서 진짜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날그날 서로가 주는 에너지에 따라서 결이 다르게 표현될 때도 있죠?) 맞아요. 그래서 어떤 날엔 배신을 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가차 없죠! (웃음) 그런 게 이 작품의 매력인 것 같아요.
Q. 어렸을 때 본인은 어떤 학생이었어요? 개그맨이 꿈이었다고 들었는데.
제가 남중, 남고를 나왔는데요.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행동들을 많이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많아요. 짝꿍이 부르면 장난으로 이상한 표정 짓고 이런 거 있잖아요. 웃어주면 혼자 즐거워하고. (웃음) 그때 누군가를 웃기는 행위 자체가 정말 재밌는 일이구나 느꼈던 것 같아요. 개그 콩트를 짜서 장기자랑 시간에 나갔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지금의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되는데요? 학창 시절에도 앞에 나서서 뭔가를 했던 걸 보면 원래 끼가 있었나 봐요.) 그게 참 신기해요. 발표 이런 건 또 잘하진 않았던 것 같거든요. 근데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 건지는 모르겠는데 꼭 수련회 장기자랑 같은 게 있으면 나가긴 했어요. 지금도 MBTI는 E이지만, I같은 E거든요.
Q. 결국 개그맨이 아닌, 어느덧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4년 차 뮤지컬 배우가 되었어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정말 양가감정이 심하게 드는 장르 같아요. 정말 좋은데 정말 힘들기도 하거든요. 몸 움직임, 노래, 연기 등은 물론이고요. 공연을 위해서 몸 컨디션까지 섬세하게 신경 써야 하니 이런 걱정들이 저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거예요. 제가 걱정이 많은 편이거든요. (이날도 황휘는 공연을 앞두고 있어 커피 대신 차를 마셨다.) 그래서 작품을 하나 마치고 나면 방전되는 느낌이 들어 좀 쉬어야지 싶다가도 동료들 공연을 보면 무대에 서고 싶단 마음이 금세 끓어오르더라고요.
Q.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기본적으로는 인성이 좋은,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아무래도 배우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직업이잖아요. 원만하게 작업들을 잘 이루어 쓰임 받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동료들과 관객들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곧은 배우, 친근한 배우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글/사진 : 공연전문인터뷰어 이우진
공연사진 : 엠피엔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