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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트리 WIKITREE May 22. 2023

현대차는 왜 49년 전 잃어버린 콘셉트카를 복원했을까?

포니 쿠페 디자인했던 주지아로와 함께 포니 쿠페 복원 및 공개

지난해 11월 24일,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신사가 현대자동차 인재개발원 마북캠퍼스를 찾았다. 한눈에 봐도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그 모습이 무색하리 만큼 목소리와 행동에는 힘이 넘쳤다.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였다.   


유튜브, 카밥


주지아로는 현대차와 인연이 깊다. 포드 자동차 부품을 조립해 차를 만들던 현대차가 국산 고유 자동차를 생산해야겠다고 맘 먹었던 1973년부터 현대와 인연을 시작했다. 당시 주지아로는 '이탈디자인(Ital Design)'이라는 카로체리아를 세우고 폭스바겐의 골프를 디자인하는 등 성공한 디자이너였다. 다른 곳보다 디자인 설계 용역 비용이 높았지만 현대차는 그를 믿기로 했다. 이듬해 10월 현대차의 역사적인 고유 모델이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된다. 초기 디자인부터 프로토 타입 생산까지 1년 밖에 걸리지 않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낸 것이다. 


토리노 모터쇼 포니 공개 재현 / 현대자동차그룹 브랜드 영상 'Next Awaits'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 차가 포니와 포니 쿠페였다. 전쟁이 끝난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은 국가에서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한 고유 모델을 생산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많은 곳에서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포니는 다시 한번 이듬해인 1975년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다. 이윽고 1976년부터 고객 인도가 시작되는데, 그 해부터 국내 승용차 시장의 44%를 포니가 채우게 됐다. 에콰도르 등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60개국 이상에 수출하기도 하며 세계에서 9번째로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고유 자동차를 개발한 국가에 대한민국을 올려놓기도 했다. 하지만 포니와 함께 공개되었던 포니 쿠페는 끝내 세상의 빛을 보지 못 했다. 


당시 프로토 타입의 포니 쿠페 / 현대자동차


실제 양산을 하기 위해 연구를 지속했지만 당시의 경제적, 기술적 환경을 고려했을 때 시장의 타당성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포니 쿠페는 그렇게 현대차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현대차와 주지아로의 협업은 그 후로도 지속됐다. 하지만 회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디자인도 인하우스에서 진행하게 되며 둘의 인연은 서서히 끊어졌다. 


현대차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이미 기반을 잡은 일본과 미국의 대중차 사이에서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성장해야 했고 '가격만 저렴한 싸구려 자동차'라는 인식도 피하지 못 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품질 향상으로 서서히 인정 받기 시작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토요타와 폭스바겐에 이어 글로벌 판매량 3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3년 한국 고유 모델을 만들어야겠다고 기획한 뒤로부터 딱 50년이 되는 해다. 


앞만 보면서 달려오던 현대차였지만 요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바로 '헤리티지'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 배경은 내연기관에서 전동화 모델로 자동차 시장이 변해가는 흐름이었다. 단순히 연료가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이에 따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전반이 모두 바뀌는 격변의 시기였고, 그렇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자동차와 다른 차별점이 있어야 했다. 현대차가 선택한 것은 과거의 헤리티지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45 EV 콘셉트 / 현대자동차


그 시작은 201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선보인 45 EV 콘셉트다. 1974년 현대가 처음으로 선보인 콘셉트카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따왔다는 이 차는 누가 봐도 포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자동차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전기차 전용의 새로운 플랫폼을 바탕으로 현대 전기차의 미래를 제시하는 콘셉트카가 45년 전 포니의 헤리티지를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2년 뒤 이 차는 '아이오닉5'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공개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현대차의 헤리티지 전략은 끝나지 않는다. 


N비전74 일러스트 / 현대자동차


22년 7월 대중에게 공개된 N비전74는 글로벌 자동차 매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수소연료전지와 BEV의 하이브리드 스포츠카라는 참신하면서 독특한 파워트레인 역시 모두의 이목을 이끌었지만, 레트로 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격적인 디자인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45 EV 콘셉트가 5도어 포니의 헤리티지를 갖고 있다면 N비전74는 누가 봐도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 하고 역사 속에 사라진 포니 쿠페의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갖고 있었다. 


롤링랩, 즉 실제로 움직이는 연구용 차량인 N비전74는 글로벌 자동차 매체의 기자들이 직접 트랙에서 시승을 하기도 했다. 콘셉트카로 실제 주행을 하는 시승 행사는 그 어떤 자동차 제조사에서도 쉽게 시도할 수 없는 행사다. 그만큼 N비전74는 현대차의 자신감이 듬뿍 들어간 차량이었다. 


하지만 N비전74의 원형인 포니 쿠페는 안타깝게도 진짜 역사책에만 있는 차였다. 45 EV 콘셉트의 베이스가 되는 포니는 실제로 양산돼 아직 소수의 개체가 실존하고 있지만, 콘셉트카로만 존재했던 포니 쿠페는 유실됐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N비전74에 대한 내외신의 관심과 상징성에 현대차는 포니 쿠페를 복원하기로 결정한다. 그것도 포니 쿠페를 만들어낸, 이제는 여든이 훌쩍 넘은 거장 주지아로와 함께 말이다. 작년 11월 현대차는 포니 쿠페 복원을 선언하며 내년 봄을 기약했다. 그렇게 2023년 5월이 됐다. 


포니 쿠페 복원 모델 앞에 선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과 조르제토 주지아로 / 현대자동차


5월 18일 이탈리아 레이크 코모에서 열린 '현대 리유니온(Hyundai Reunion)' 행사에 포니 쿠페의 복원 모델이 공기됐다. 정의선 회장을 비롯해 전직과 현직의 주요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래를 향한 현대차의 비전과 방향성을 공개하는 브랜드 플랫폼이었다. 이와 함께 같은 지역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클래식카·콘셉트카 전시회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 데스테(Concorso d'Eleganza Villa D'Este)'에는 현대차 최초로 N비전74를 출품하기도 했다.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 데스테2023에 전시된 N비전74 / 현대자동차


이 자리에서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CCO(사장)는 '현대차는 고유의 유산에서 얻은 영감을 토대로 새로운 형태의 미래 모빌리티를 위한 길을 열어 디자인 혁심의 중심에 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엽 디자인센터장 부사장은 'N비전74는 과거의 노력에 대한 헌사이자 미래를 향한 우리의 선언이며, 포니 쿠페 콘셉트의 대담한 정신을 미래지향적 디자인으로 계승하여 한국 최초의 스포츠카를 만들고자 했던 엔지니어들의 꿈을 실현한 모델'이라고 밝혔다. 


최근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들이 엠블럼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 한 회사를 상징하는 C.I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국산차를 비롯해 BMW, 푸조, 폭스바겐 등 많은 회사들이 C.I를 단순화하고 있다. 이는 모바일 시대에 SNS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가 많이 전파되고 사람들의 인상에 깊게 낙인되기 위한 움직임으로 분석된다. C.I가 가지고 있는 '아이콘'으로서의 목적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의 전현직 임직원들이 복원된 포니 쿠페 뒤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현대자동차


이런 흐름을 봤을 때 현대차의 디자인에 대한 방향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아이코닉한 모델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현대차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어디서 본 듯 친숙한 디자인이지만 세련됐으며, 과거의 자동차를 오마주 했기에 디자인도 간결한 편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쉽게 각인될 수 있는 디자인이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자동차는 이제 막 초기 단계다. 아직까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많고 방향성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줄 것이다. 현대차가 지금의 방향성을 유지한다면 우리가 과거 자료나 추억에서만 들쳐볼 수 있던 다양한 헤리티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현대차가 이탈리아에서 열었던 '현대 리유니온(Hyundai Reunion)'은 단발성 행사가 아닌 브랜드 플랫폼으로 소개돼 있다. 또한 앞으로도 다양한 헤리티지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유서 깊은 브랜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소통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곧 우리 곁에도 포니 쿠페를 비롯한 다양한 헤리티지의 산물이 다가올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디 다음 '현대 리유니온'은 국내에서 열려 현대차와 가장 오랜 생활을 함께 해온 대한민국 국민들이 현대차의 역사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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