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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May 05. 2017

나아지기 위한 투쟁, 갈등

:: 연극 죽음과 소녀



할리우드 시나리오의 거장 로버트 맥기는 ‘이야기란 인간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삶의 균형을 찾아간다는 것은, 갈등을 극복하고 고민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주인공이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은 곧 이야기의 중심이자 목표인 것이다.


ⓒ두산아트센터 페이스북

작년 <마이 아이즈 웬트 다크> 이후로 오랜만에 스페이스111을 찾아온 양손프로젝트. 양손 프로젝트의 이번 극 <죽음과 소녀>는 칠레의 독재 군부 시절을 겪은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이다. 양손 프로젝트는 작품 선정을 포함한 전체 창작과정을 팀원 모두가 공유, 결정한다. 유연한 연기적 합이 이미 검증된 세 명의 배우들과 2014년 죽음과 소녀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받은 박지혜 연출의 <죽음과 소녀>.  초연 이후 3년 만의 공연이었다. 압축된 서사와 절제된 연출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과 악의 대립이 명확하지 않은 세계, 평화를 얻기 위해 폭력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세계, 정의가 사라진 곳에서 용서와 처벌을 좇는 세계. 이 모든 세계는 무척이나 모순적이지만 지독하게도 현실을 똑 닮았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 지독한 갈등을 풀어갈 수 있을까.


ⓒ두산아트센터 페이스북

연극은 긴 테이블 밑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맨발의 빠울리나로부터 시작된다. 군사독재 시절, 빠울리나는 병원 의사에게 고문과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당시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들을 수 있었고, 시각을 제외한 그녀의 모든 감각은 예민하게 그날의 악몽들을 몸에 기록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빠울리나. 그러던 어느 날, 빠울리나의 남편 헤라르도는 차가 고장이 나고, 우연히 길가에서 만난 의사 로베르또는 그를 돕는다. 함께 집으로 온 헤라르도와 로베르또. 빠올리나는 로베르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15년 전 자신을 고문했던 의사임을 확신하고 그를 감금한다. 하지만 변호사이자 인권위원회 위원인 헤라르도는 인권과 법의 입장에서 로베르또를 변호한다.
  
이들의 극을 보고 있노라면 혼란스러운 기분이 든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그 모호한 경계 때문에 관객은 편을 들어줄 주인공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해에 대한 보상은 어떤 권력에서부터 오는가. 그 보상은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왜, 허락할 수 있는 것인가. 선이라 생각했던 인물에게서 잔혹한 파괴성을 느끼고, 악이라 생각했던 인물에게서 불쌍한 동정을 느끼고 있노라면 문득 피해에 대한 보상도, 보상에 대한 판단도, 역시나 폭력적이고 위선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선악 구도 속에서는 선과 악을 과연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두산아트센터 페이스북

헤라르도의 말대로 ‘과거만 끌어안고 사면 다 죽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과거란 ‘덮어버려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진실이 너무 과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개 같은 시간을 버티고 살아남았으면 된 것’이기 때문에.
헤라르도의 말이 큰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은 그렇게 간단명료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여전히 너무나도 많은 갈등이 숱하게 널려 있고, 그 속에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도, 묻혀서는 안 될 진실도 존재한다. 모호한 선과 악이 서로 용서와 투쟁을 반복하던 극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라는 심리적 분출구를 제시하기보다는 되레 묵직하고 거대한 숙제를 남기며 막을 내린다. 이를 테면 이 세계의 갈등에 대해 고민하는 것, 그 갈등에 임하는 나의 온도를 재어보는 것, 나의 역할과 나의 책임에 진지하게 행동하는 것, 분열된 이 세계를 잇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삶의 균형을 잘 찾아가는 것, 모든 불편한 과정 속에서도 실재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또렷이 귓가에 맴돈다.

갈등은 나아지기 위한 투쟁이라는 데서 분명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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