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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일드멜론 Sep 17. 2018

어느 곤약인간의 고백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만나는 게 그저 그래. 곤약같아.





‘밥 잘사주는 예쁜누나’에서 손예진의 밉상 구남친이 결별을 선언할 때 했던 말입니다. 

이 주제를 받아들고 전 제가 좀 그렇더라고요. 
“아, 나는 곤약 같은 무색무취 인간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스스로를 꽤나 긍정적인 편이고, 대부분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주제를 받아들고 나니, 
생각보다 잘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살면서 그 흔한 연예인도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고, 
예술, 스포츠에 대한 조예가 있지도 않고고, 
딱히 엄청나게 좋아하는 음식이나, 그렇다고 딱히 엄청나게 싫어하는 게 있지도 않더라고요. 
심지어 결혼하기 전에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 불꽃같은 연애 한번 못해보고, 이런 노인 같은 연애만 하다가 결혼해도 되나.’
였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가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오랜 고민 끝에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떠올려봤습니다.    


첫번째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 kevindelvecchio, 출처 Unsplash




저는 대학시절, 하루에 세 탕씩 약속을 만들 정도로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당시엔 사람 그 자체보다는
무언가 뒤쳐지는 느낌이 싫어서 어디에든지 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왁자지껄 바쁘게 시간을 보낸 후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몰려왔고, 
스스로가 소진된다는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다가 4학기 정도를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그것도 전부 다른 이유로 짧게 짧게 시간을 보내야했죠. 
상하이, 베이징, 쿤밍, 독일..
한번, 두번 까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연락도 하고, 
돌아오면 핑계 삼아 왕창 뭉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횟수가 늘고, 시간이 길어지면서
바닷가에서 맨손으로 모래를 퍼올리고나면 
샤르르하고 빠져나가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또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반짝반짝한 금모래알만 남았습니다
  
제가 억지로 채웠던 '양'위주의 관계, 
욕심, 허세가 스르르 빠져나가고,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 그리고 
정말 날 아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만 남는 느낌이었죠. 

그때 관계와 시간에 대한 생각,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의미 없는 사람들과의 
의미 없는 관계에 
굳이 내 시간과 감정,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는 없구나.' 

'내가 사랑하는 내사람들과 나누는 시간들만 알알이 고스란히 쌓이는구나.'


그래서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좋고라면만 먹고 깔깔대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비교적 어린 나이에 깨닫게 해준 시간에게 감사합니다

다시 어른이 되어 외국에 있는 시간 역시
때로는 학생 때보다 훨씬 더 외롭고 춥지만 
대조적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 선명하게 해줍니다
  
2년이나 떨어져 지내다 상봉한 남편과 함께하는 작은 순간순간도, 
비록 몸은 함께할 수 없지만 아침, 저녁으로 함께하는 사랑하는 엄마와의 통화도,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오랜 친구와의 걸걸한 만남도 참 좋습니다. 
  
두번째로는, '신앙이 있음'이 좋습니다


© benwhitephotography, 출처 Unsplash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제게 당면했던 '해야하는 것' 말고 
따로 가장 시간을 많이 쏟은 일은..
굳이 명명하자면 '신앙생활'이었습니다. 

누가 들으면 대단한 신자인양, 
뭔가 꽤 착실하게만 산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중2병이 쎄게 걸렸던 바람에, 
학창시절에는 오빠한테 머리카락이 동강 잘린 적도 있고, 
담 넘다가 담장에 걸려서 피를 철철 흘린 적도 있습니다. 
또 주일에 여기저기 놀러 댕긴 적도 많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매순간 순간 중심에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자존감이 무너질 때, 스스로가 싫어질 때도 
기도할 수 있어서, 
결국에는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그분을 신뢰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리고 백 마디 위로의 말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간 순간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이 좋습니다. 
  
세번째로는최근에 시작한 '좋은분들과 글쓰기
그리고 이를 통한 교감'이 좋습니다

© rawpixel, 출처 Unsplash


한국에 있을 때 감사하게도, 
사내 MC나 발표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스스로 언어두뇌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만에 오니, 
저는 그냥 아둔한 외국인이더라고요. 
얼마 전, ‘일과삶’님이 쓰셨던 글제목이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 였는데요. 

여기서 저에게는 
언어가 무너지니, 사고가 무너지고, 
사고가 무너지니 논리가 무너지고, 
논리가 무너지니, 자존감이 무너지는 
연쇄 무너짐 현상이 발생해버렸습니다. 
대형참사였죠.    
  
그런데 글을 쓰고, 내 이야기를 정리해나가면서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고, 
무너진 자존감과 논리를 찾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 좋은 기회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불평할게 많지 않은 상황인데도
제 마음에 여유와 감사함이 없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는 말이 있죠. 
글쓰기를 위해 
이 나라를 조금씩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이 곳에 대한 예쁜 구석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의 예쁜 구석도 그렇고요. 
  
그리고 이 글쓰기를 통한 소통과 합평의 에너지는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더 따뜻하고좋더라고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분들과 글을 통해서 깊이 만나고, 
따뜻한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신기하고 참 감사합니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다른분들이 이 주제로 글쓰신거 보니깐 
읽기만 해도 너무 좋고, 웃음이 나던데
전 ‘무색무취 곤약 인간’인 걸 인증한 것 같아 조금 부끄럽습니다. 
  
물론 저도 페퍼민트차도 좋아하고, 
삼겹살도 좋아합니다. 
따뜻한 햇살도, 잘 말려진 빨래의 뽀송뽀송한 햇빛냄새, 초록초록한 것들도 좋아합니다. 
여행가는 것도 좋아하고, 여행 계획하는 것도 너무 좋아하지요. 
  
근데 처음엔 잘 안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습니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는
'해야 하는 것'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또 정말 날 행복하게 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를 
더 많이 보고, 맡고, 듣고, 맛보고, 
느껴보고 고민해봐야겠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줘야겠다고 결심해보았습니다.


스스로를 무색무취 곤약취급 하지 말고
밥 안 사줘도 예쁜 나로 
잘 토닥토닥 안아줘보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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