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과 모세의 인생
그는 버려진 아이였다.
이름부터 '물에서 건진 자'라는 뜻이었으니 스스로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갈대 상자에 실려 강가를 가로지른 모세는,
마치 하늘의 뜻인 것처럼 파라오의 딸에게 입양된다.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면서 친부모를 어떻게 기억했을까?
자신을 버려 다른 사람의 자녀가 되게 했다는 것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결과적으로 자신을 왕족으로 만들어준 그들의 선택을 다행으로 여겼을까.
혹은 자신을 버려야만 했던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떠올리고 눈물 훔쳤을까?
분명 어릴 적부터 이집트와 히브리 그 어느 쪽에서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목도했을 것이다. 이집트 왕실은 그의 산성이자 가시였다. 탐스러운 음식을 먹고, 노예들의 시중을 받고, 왕궁의 신성한 장소들을 누볐지만, 정통 이집트 출신의 왕족들과 온전히 어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원래 죽었어야 할 '히브리 사람'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물질적 향락과 권력 또한 때로는 그 자체로 죄책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앉아서 보는 왕궁 밖에서는 그의 친부모의 민족, 히브리 사람들이 학대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하루아침에 히브리 사람들을 위해 애굽 왕궁의 질서에 대항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애굽의 모든 통치 질서, 신들에게 대항하는 반역이었다.
어느 날 모세는 일을 저지른다. 자기 민족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그는 마침내 애굽과 히브리의 중간선을 벗어나 히브리 편에 섰다. 체제를 전복하는 저항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체성에 한 획을 긋는 대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결과는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모세는 애굽인이 아닌 히브리인의 자리를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히브리인마저 되지 못했다. 어느 히브리 사람들은 서로 다투다가 모세가 개입하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묻는다. 그들에게 모세는 자신들과 동거동락하는 형제가 아니라, 저 이집트 왕궁의 권력자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모세는 이집트인과 히브리인 모두에게서 타자일 뿐이었다.
애굽은 모세에게 있어서 실패의 공간이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왕실 엘리트들에게 멸시받는 동시에 히브리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곳, 그리고 그 상처를 오로지 혼자 간직하며 두려운 추격을 피해 떠나야 했던 그 장소로 남았다.
그런 모세에게 야훼 하나님이 어느 날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출애굽기⟩, 공동번역개정
하필 모세였다. 애굽에서 도망친 히브리 사람이 모세 한 명은 아니었을 텐데. 개중에는 왕궁 출신인 모세보다 히브리인들이 더 친근감을 느낄 인물도 있었을 것이다. 더 똑똑한 사람, 더 리더십 있던 사람, 더 용감한 사람, 더 언변이 뛰어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모세에게 찾아오셨다.
모세의 특별한 점을 하나 찾자면,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애굽과 히브리 사람에 대한 상처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히브리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히브리 사람들 편에 선 뒤에도 배척받았다. 또 애굽의 모든 땅은 그가 정체성 사이에서 유리하게 만든 모래성이었고, 결국 무너져 자기를 추격하는 병사가 되었다.
다시 한번, 야훼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너의 트라우마와 컴플렉스가 얽혀 있는 '애굽'으로 돌아가서, 너를 포기하고 거부한 히브리 사람, 즉 '이스라엘 자손'을 건져오라고.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만드는 데에 있다. '하필' 모세라는 그 생각은 그분의 마음을 살필 때 '바로' 모세이기 때문으로 바뀐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출애굽기⟩, 표준새번역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모세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서러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언약과 하나님이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 고통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 마주했을 절망을, 갈대상자 안에서부터 느끼고 울었던 모세다.
바로 모세이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의 마음 또한 이해했을 것이다. 모세를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고 벌벌 떨면서도 숨겨서 키워냈던 부모이다. 그랬던 부모가 아기의 생명 보존을 위해 결국 그를 떠내려 보냈다. 그 순간 느꼈을 그 비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모세는 커가면서 헤아렸을 것이다. 같은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계셨을 하나님의 마음을 모세가 아닌 누가 알아챌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맡겨두신 것은 요셉을 통해 계획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던가. 이스라엘 백성의 보존과 이후 언약을 위해 그 탄식을 인내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비통하는 마음으로 상자를 띄운 부모의 자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바로 모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절한 열심 또한 공감할 수 있었다. 히브리와 이집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방황했던 모세만이, 왜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을 떠나야 하는지 온전히 깨우칠 수 있다. 히브리 사람이 온전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애굽에 노예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파라오와 이집트 신의 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야만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 모세는 애굽에서의 모든 생애동안 생생히 느꼈다. 여기서는 애굽인으로도, 히브리인으로도 살 수 없음을.
한 사람의 이야기(his story)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설 때, 그것은 한 줄기의 역사(history)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점은,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위한 역사인 동시에 '완전한' 개인의 서사가 된다는 점이다. 바로 모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 때문에' 모세는 그의 모든 쓴 우물이 생수의 강이 되는 변화를 경험한다. 모세의 영혼에 깊이 자리 잡은 중심의 소원들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위해 모세가 부르심을 받지만, 그 부르심을 통해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난다.
우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사역은 모세 개인의 모든 상처를 씻겨내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있음"을 첫 번째 표징으로 받는다. 눈에 보이는 어떤 기적이 아닌데, '함께함'이 어떻게 표징이 될 수 있는가? 모세는 많은 이들에게 버려짐을 당했다. 부모에게, 자기 민족에게, 애굽의 권력에게 버려지고 고독히 광야로 도망쳐야 했던 사람이다. 그런 모세에게 누군가가 늘 함께해 준다는 보증은 단순한 응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확신이 된다.
모세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는 것도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를 소집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히브리인 대표들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는 지위, 그것이 진정한 히브리 사람의 증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평생을 갈망하던 히브리인의 정체성, 그리고 그들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는 기회였다. 이후 시내산 언약을 통해 진정한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는 그 순간 앞에 선 것도 모세의 정체성을 다시 써 내려가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태생부터 그를 죽이려 했던 애굽에 대한 응보 또한 이루어진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조롱하던 이집트 왕족들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이적을 선포하는 자리에 서며, 그들에게 "신과 같이 된다(출애굽기 7장 1절)". 이집트의 구조와 체계를 무너뜨리는 그 정점에 서고, 결국은 이집트인들에게 온갖 전리품을 얻어 떠나게 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행해진 이적은 애굽의 모든 첫아들을 앗아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생명을 추격당했던 모세와 그 부모의 원한이 갚아지는 일이기도 하였다.
야훼의 천사가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그에게 나타났다. 떨기에서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을 본 모세가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을 야훼께서 보셨다. 하느님께서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셨다.
⟨출애굽기⟩, 공동변역개정
하나님은 타지 않는 떨기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히브리어로 연약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한 떨기이다.*
불꽃 한가운데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는 모세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그것은 전능한 하나님의 역사 아래서도 타지 않는 모세 자신의 이야기를 예표하였을 것이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
모세의 모든 상처에 소금을 뿌릴 그 시간, 이집트로 돌아가서 백성과 파라오를 마주할 그때에도
자신의 고름이 터지고 문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생살로 남아 환하게 보일 것임을, 트라우마가 뱀처럼 그를 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적을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그는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추상적인 절대자의 대의로만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세에게만 주어진 사명, 바로 모세 자신의 구원과도 같다.
그 사역을 통해 모세의 모든 상처와 실패가 선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다.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7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