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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Oct 20. 2019

#9. 가슴 뜨거워지는 호의

여덟 번째 날. 로그로뇨(Logroño)에서 나헤라(Nájera)까지

 

 이른 아침 로그로뇨(Logroño)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발레 교본에서나 본듯한 자세가 똑바로 곧은 한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다리가 많이 불편한 거야? 그렇게 다리를 절면 균형이 안 맞아서 더 불편할 텐데..."
"물집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왼발이 거의 만신창이거든요"
"그래? 이따가 다음 마을에서 만나면 한번 봐줄게"
곧은 자세의 그를 닮아서인가 말투도 굉장히 사무적이고 딱딱하게 말하는 그에게 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봐준다니, 뭘 봐준다는 거지?' 그날  아침 난 뭘 봐준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매끄럽지 못한 영어를 쓰는 그와 듬성듬성 알아듣는 나의 적당하면서 불안한 의사소통이라 생각하고 그땐  대충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다음 알베르게에서 나의 카미노 순례길에 대한 심리적 터닝포인트를 마주할 거라고는 이때는 알지 못했다.



로그로뇨를 벗어나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생각보다 제법 큰 도시였고, 중간에 바에 들려 커피와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고, 중간중간 만나는 예쁜 건물과 동상들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로그로뇨 도시 끝자락부터는 길고 긴 공원이 펼쳐지는데 중간에 있는 호수에서 오리 구경도 하고 틈틈이 다른 순례자들과 재회하여 수다를 떨기도 했다.  로그로뇨 시외 초입부터는 길고 긴 산책로를 따라 길쭉한 가로수가 길 양쪽에 나란히 펼쳐지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그 길을 따라 걸으니 상쾌함과 함께 설레는 기분까지 들었다. 중간중간 돌 벤치가 있어 거기에 앉아 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담배 쟁이 스테판과 같이 있었기에 심심하지 않았다.
왼 다리가 아파서 느린 나와, 까미노 길이 후로 흡연량이 급속하게 늘어 자주 담배를 피우는 그와는 이 날 오전 내내 계속 부딪히게 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국적의 그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이 순례길통해 여유를 얻고자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스트레스 없는 이 길에서 더욱 담배가 늘었다는데 왜 때문인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병원이 있었던 자리
Navarrete 성당




 예쁜 산책길을 벗어나서 나바레떼(Navarret)에 도착할 때까지는 재미없고 지루한 포도밭을 살짝 지난다. 그다지 긴 길은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지만 고급차 타다가 똥차다 것처럼 이쁜 길을 걷다가 지루한 길을 걸으니 길지도 않는 그 길이 심리적으로 지지리도 재미없었다. 그러다 도착한 마을 나바레떼, 초입에 식당이 있었으나 배고픔을 참고 성당까지 갔다. 스페인이든 유럽 어디든 중남미 어디든 오래된 마을의 도시 입지 조건은 대부분 똑같다. 마을의 정중앙에는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과 상점, 식당이 들어선다.  민생고를 참으며 성당까지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성당 바로 옆에 식당이 있었고 벌써 다른 순례자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가운데 반가운 얼굴 써니가 보인다.
"꺄울~ 써니야~"
"언니~"
 써니론세스바이야스에서 수비리를 이동하면서 만났으니 딱 하루 만나 알고 지내다 헤어진 한국 처자이다. 하루 알고 지낸 처지인데 왜 이리 반갑던지,  정을 쌓는 데는 시간과 결코 비례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
내가 까미노 중간에 산세바스챤으로 여행을 다녀오느라 이틀 정도 그녀와 내가 일정이 벌어졌는데, 그녀가 천천히 쉬며 놀며 걸은 탓에 다시 그녀와 재회하게 되었다.
점심으로 까르보나라와 여름 와인인 틴토 데 베라노를 시켜놓고 그녀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와 함께 오후 내내 걸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놓고 걸어 다니지는 않지만 오늘은 불편한 발 때문에 짧은 거리를 걸은 생각이었고 그래서 오늘은 목적지는 밴토사(Ventosa)였는데, 벤토사 초입에서 황당한 야기를 들었다.
벤또사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1킬로 정도 돌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띠로리~~. 오늘 1킬로 걸어 들어간다는 야그는 내일 다시 그 1킬로를 돌아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인데...
애당초 나바레떼에서 소떼스(Sotés)거쳐 벤또사를 갔으면 돌아갈 일이 없었을 텐데 짧은 거리로 이동한 탓에 이런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까미노 길 중간중간마다 길이 갈라졌다가 합쳤다가를 반복한다. 까미노 길의 상권 문제 때문에 주변 마을의 입김으로 길이 좌지우지한다고 들었는데 이로 인해 나도 목적지에서 벗어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우찌 할까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다가 그냥 나헤라(Nájera)까지 10km를 더 걷기로 했다.
"언니,  영화 '호빗, 뜻밖의 여정'이네요. ㅋㅋㅋㅋ"
"아, 그러네. 예상 밖의 긴 여정이야. ㅋㅋㅋ"
그렇게 얼떨결에 난 나헤라로 이날의 목적지를 변경하게 되었다.

10km의 거리를 써니와 함께 걸으며 쉬며 놀며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러다, 길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을 때였다. 세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걸어오는 모습에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중 한 남자가 바로 아침에 이야기를 나눈 바른 몸매의 아저씨였다. 그가 나에게 다음 거처를 물었을 때, 난 나헤라로 간다 했고 그도 거기서 보자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까지도 난 그냥 건성으로 받아들였다.
"그 오렌지 당신 거예요?" 인사를 나누고 있는 중간에 써니가 그 남자의 손에 가리키며 물었다.
그 남자 손에는 비닐에 싸인 오렌지를 들고 있었는데, 내 눈에도 그 비닐봉지에 든 오렌지가 뭔가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니, 오다 주었는데, 니껀가봐?"
아까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렌지를 까먹겠다고 써니가 가방에서 꺼내는 것만 봤지 정작 먹은 기억은 없었는데 아마 거기에 두고 온 모양이다. 돌려받은 오렌지를 먹으며 우린 한참을 웃었다.
"써니야, 좋은 생각 있다. 너 오렌지에 니 이름 이랑 연락처 남겨서 흘리고 다녀라. 혹시 아냐? 뒤따라오는 순례자 중에 멋진 남자가 아까처럼 주어다 줄지..."




그렇게 농담 따먹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헤라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알베르게까지는 꽤 긴 거리가 남았기에 우린 마을 초입에 있는 바에 들려 타파스와 맥주, 와인을 먹으며 놀았다.
"오늘 안에만 가면 되지 뭐"
4 월 초반의 까미노 길은 아직은 비성수기라 숙소에 여유가 있으니 난 늘 오늘 안에만 도착하면 되다는 심보로 카미노 길을 다녔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술이 알딸딸하게 취해서 거의 굴러가다시피 하여 나헤라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거의 다 되었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둘이서 깔깔거리고 웃으며 숙소에 들어가니 다른 순례자들이 우리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뭐가 그리 낄낄댈 만큼 웃긴 게야??'
  늦게 도착한 마당에 또 운도 좋다. 팜플로나에서부터 인연이 된 귀염둥이 세 친구들이 삼겹살과 밥, 고추장에 저녁을 먹고 있는 타이밍이라 고맙게도 나는 슬쩍 입을 보탰다.




 저녁을 먹고는 와인을 마시며 이래저래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까 곧은 자세의 아저씨가 한 보따리의 구급약품을 들고 나에게 왔다.
아저씨 이름은 아돌프. 아돌프는 나의 왼발을 보여달라고 하고서는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고  처방도 해줬다.
심지어 주사까지 놔주셨다.
천성적으로 뼈가 하나 더 많은 기형 발이지만 사는 데는 별지장이 없었고 심지여 다른 트레킹이나 등산에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장기적으로 다니니 문제가 생긴 데다가 새로 산 신발도 문제가 있었으니 이리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발바닥에 크게 난 물집과 부풀어 오른새끼발가락이 터지는 것도 모자라 이젠 너덜너덜해진 상처 사이로 생살까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러운 나의 발을 붙잡고는 아돌프 아저씨가 이리저리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는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나둘씩 자신이 아픈 곳과 문제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돌프는 스페인의 응급구조요원 그것도 베테랑 선생님이었다. 게다 까미노 길도 여러 번 경험이 있었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요?"라는 나의 물음에 아돌프는 그냥 돕고 사는 거고 자신도 그냥 봉사하는 거니 괜찮다고 했다. 대신 약은 못 주니 약국 가서 내가 사라는 말과 함께  임시로 봉할 붕대는 조금 챙겨주셨다.  마음 한구석부터 서서히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뜨꺼워짐의 온도는 까미노 길 내네 높아만 갔다.

이렇게 아돌프 선생님께 관심을 한번 받고 나니 너도 나도 다들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걱정이 되었는지 브라질리언 안드레가 바셀린까지 한통 나에게 기증하였고 다른 브라질 할아버지들을 비롯한 주변의 어르신들의 전폭적인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 관심과 염려는 산티아고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생살 돋는데 도움이 되는 약과 깨끗한 거즈, 그리고 안드레가 챙겨준 바셀린.


아돌프의 교육시간


 나의 치료가 끝난 이후에도 아돌프는 계속 다른 사람들을 봐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처뿐만 아니라 체형에 따라 가방 메는 법, 신발 신는 법을 설명해주느라 제대로 휴식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참으로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다.  그리고 이 날 이후로 아돌프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떡하든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웠다.

그런데, 우연은 참 신기하게도 다가온다. 이 길에서 만났던 한 해외 친구가 스페인의 순례길 관계자분 중 한 명이 한국에 순례길 지사를 여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서 한국인인 나를 추천하고 싶다며 연결을 해주었고, 그렇게 알게된 그 관계자분이 바로 아돌프였다. 세상 참 좁다!






여하튼, 이날 받은 따뜻한 치료와 관심 때문에 난 기분이 업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사온 와인으로 술이 차올랐다.
알베르게의 마감시간인 10시가 넘어 10시 반까지 수다를 떨었으니, 지난 로스아르코스에서 내가 구시렁거리며 욕했던 순례자들(늦게까지 술 먹고 수다 떨던)과 다름없이 행동한 것이다. 이런 민폐쟁이같으니라고...

10시 반에 침실로 들어감과 동시에 난 필름이 끊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난.....


'진정한 자아를 찾는 여행' 이런 말을 딱 싫어한다.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멘트는 오글거려 진심 싫어하지만 난 이번 카미노에서 자아를 발견했다.

'개차반'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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