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 녀석 성휘 Oct 18. 2019

#8. 한국 아줌마의 파워!!

일곱 번째 날,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까지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의 이삭(Isaac) 알베르게를 어기적 어기적 떠나면서 거기서 만난 한국 아주머니 두 분과 아침부터 수다를 떨었다. 지난밤에 잠깐 뵈었기는 하나 그분들은 일찍 취침하셨기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른 아침 숙소의 한 휴식공간에서 커피를 마시길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담소를 나누었고 그것이 그날 우리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물집으로 가득한  내 왼발의 상태가 점점 나빠져 다리를 절기 시작했고, 덕분에 걸음의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다. 아주머니 두 분 중의 한 분은 배낭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 상태라 짐 없이 먼저 출발하셨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분은 배낭을 메고 걸으셨는데, 걸음 속도가 나와 비슷해서 이날 이분과 오랜 시간 같이 걷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머니 두 분이라고 말했지만, 난 그분들을 언니라고 불렀으니 '언니'라 호칭을 바꾸겠다
50대 중후반이 신 이 두 분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시는데, 두 분의 나이 편차가 살짝 있는 관계로 편의상 큰언니와 작은언니로 불려야겠다.

 어느 누구나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겠지만은 중년의 어머님들이 가정을 두고 한 달 이상 외국에 머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가족들의 서포트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용기도 커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배낭여행을 많이 해서 경험이 있다면 모를까, 어리지 않은 나이에 지금처럼 장시간 누구의 도움 없이 해외를 다니는 것은 낯설고 어려운 일이며, 심지어 무서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가이드의 도움 없이 오롯이 스스로의 두발로 여행하는 이 까미노를 도전한다는 것은 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두 분은 이 길에 올라선 것만 해도 벌써 절반 이상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두 분 중 큰언니와 같이 걸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처음엔 신변 잡다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역사, 건축 종교 등의 잡다한 이야기를 엄청나게 나누였다. 큰언니는 특히나 식물들에 박학다식해서 길에 핀 꽃, 나무 하나하나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는데,   사과나무, 체리나무, 배나무, 철쭉, 데이지.... 난 그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본 다양한 식물군보다 더 많이 공부한 느낌이다.  당시엔 엄청 공부가 되었지만 휘발성 기억력이 그것을 다 무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쉽다.
 큰언니와  수다 삼매경에 길에서 까르르 웃으니,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다들 뭐가 그리 재미있냐며 우리의 대화를 궁금해했다. 난 유난히 웃음이 많은 편인데, 까미노 길에서도 엄청 많이 웃은듯하다. 웃음이 많은 덕분에 힘든 육체적 피로가 많이 가셨고, 그 때문에 더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난 이 언니들을 비롯하여 늘 웃음이 가득한 순례자들과 유난히 많이 지낸 듯 하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진짜 명언 중에 명언이고, 그것은 이 까미노 길에서도 통한다.
생각해보면 까미노 길에서 만난 수많은 순례자들과 힘차게 같이 웃고, 춤추고, 노래 불렀기에 그 길고 지루한 여정이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득한 것 같다. 




       Torres del Río                                   


순례자들이 걸어놓은 각종 기념품. 그 와중에 남북통일 국기도 보인다.
San Pedro 수도원과 Santa Maria 성당


 산볼(San Bol), 또레스 델 리오(Torres del Río), 비아나(Viana)

 마을 자체는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이 이쁜 마을들을 지나는 길 자체는 약간은 지루한 길이였다. 그런데 그 지루한 길을  큰언니와 이야기하면서 지나왔기에 재미가 한층 있었다. 
"언니, 다음 마을까지 4킬로 남았으니깐, 대략 한 시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되겠어요"
"어? 그것 어떻게 알았어요?"
"네?"
"한 시간에 4~5km 정도 걷는 거 어떻게 알았느냐고?"
"글쎄요. 한국에서도 트레킹이나 산책하는데 가끔 트래킹 할 때는 운동 측정 앱을 켜고 하니깐 제가 산을 어느 정도 타는지는 대충 알아요"
"아~그래. 난 이번에 알았는데.. 이번에 여기 온다고 미리 연습했거든요"
큰언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연습했다고 했다. 등산화도 처음 신어보는 거라 익숙해질 겸, 배낭도 처음 매보는 거라 연습도 할 겸, 한국에서 미리 등산화에 배낭을 장착하고는 동네를 걸어 다녔다고 했다.
영어도 잘하고 해외 산도 타본 경험이 있는 작은언니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민폐는 끼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연습해온 것이다.  
묵묵히 혼자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처음에 심드렁했던 남편분도 적극 응원해주셨다고 한다.
준비하고 연습했던  위대함 앞에서  고작 만보 걷기로 연습한 나로서는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이동 시간과 거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차로 다닐 때는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남은 거리가 얼마인지 이동시간이 얼마 있는지 익숙하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도보로 다닐 시에는 구글맵을 켜지 않는 이상 일상생활에서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부동산 중개소의 '역으로부터 걸어서 2분' 따위나,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 달릴 때의 속도 이외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깐...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학교에서 충분히 배웠다.   

   'A군은 집에서 학교까지 분당 75m의 속도로 걷고.... '

초등학교부터 등장하는  이런 수학 응용 문제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단지 지루한 수학 문제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 부분이다. 문제에서 보면 1분당 75m 걸으니 60분이면 4.5km를 걷게 된다. 즉 시간당 평균 4.5킬로미터 걷는 셈이다. 

 신체적 조건에 따라 그 속도도 다 다르겠고,  야외이다 보니 고도도 계속 다르고, 자갈길이나 모랫길 등의 환경도 다르니 사람마다 그 평균치가 다 다를 것이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평균치를 추려내 보면 꼭 저 수학 문제 마냥 비슷한 속도가 나온다.  그러니깐 까미노 길이 실상 우리들이 어릴 적 수업시간에 이론으로 계산돼있는 수치라는 것이 어이없으면서도 재미있다.  








Santiago el Real 성당
로그뇨스 대성당



 언니들의 이야기로는 카미노 초반 작은언니가 잠깐 아팠다고 했다. 때문에 큰언니가 작은언니를 붙잡고는 간절히 기도를 했다고 했다. 아플 거면 대신 자신이 아프게 해 달라고... 그 기도가 응답받았는지 작은언니가 금방 쾌차했다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희생과 헌신의 상징인  '이삭(Isaac)'의 기도가 자기의 기도 같았다는 것도 덧붙여주었다.
"어머, 언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알베르게 이름도 이삭인데요"
이삭이라는 이름에 샌드위치를 떠올렸던 내가 밉다.


 


거의 30km가 되는 길이였지만, 큰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면서 가끔 작은언니와 조우하면서 긴 시간 지루하지 않게 온 것 같다. 
이날 도착한 마을은 로그로뇨(Logroño) 제법 큰 도시라 선택권이 많았다. 식당도 많고, 슈퍼도 많고, 심지어 클럽까지도 있어 (순례자 중 피 끓는 녀석은 클럽까지 밤새 방문하셨다.)
그래서, 두 언니들과 어제 알게 된 한국 처자들과 같이 유명하다는 타파스 골목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역시 사람이 많으니, 음식 종류들이 많아져서 좋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난 하루에 한 단어씩 스페인어를 공부했는데, 일일 새 단어는 주로 음식과 술에 관한 것이었고, 덕분에 나의 스페인 음식의 능력치도 꽤 높아졌다. 그리고 이날 난, 식당에서 갖은 음식과 술을 주문하며 설명해주느라 일행들 앞에서 잘난척하느라 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갔다.  데헷!
식사 후에 숙소에 돌아와서도 다른 일행들과 조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와인 몇 병과 각출한 안주들과 함께...

그렇게  순례길 7일 차의 하루도 마감되어갔다.
겉은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사실 나의 왼발을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덕분에 눈에 띄게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7. 미친X 여기는 왜 와서 이 고생이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