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날: 까리온에서 사아군까지 41km
[산티아고 순례길]
까리온 데 콘데스(Carrión de Condes) 에서 사아군(사하군, Sahagun)까지 41km
나란 인간은 그리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다.
아! 말이 잘못되었다. '부지런하지 않다'는 것보다 게으름이 차고 넘치는 인간이다.
또한 마음을 잡고 계획을 세우고 만반의 준비를 하며 실천에 옮기는 그런 바람직한 인간 군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기는 하는데, 그게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늘 논리적인 변명을 찾아내는 데 능수능란해서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그 계획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만 가지나 나열할 수 있다. 때문에 계획을 세워도 안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준비과정에서도 그만둘 변명거리를 찾았으니, 이제는 그런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이젠 계획조차 잘 세우지도 않는다.
대충대충, 꼴리면 하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살아왔다.
여행도 마찬가지, 그냥 어디를 가겠다는 막연한 목표만 있고 나머지 디테일한 것은 그때그때 상황 봐서 충동적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은 여기 순례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산티아고까지 가겠다고 목표는 세웠으나, 며칠 만에 가겠다거나, 하루에 얼마씩 걸어야겠다는 계획 따위는 세우지도 않았다.
그냥 '남들이 이 정도 하니깐 나도 이 정도 하면 되겠지.', '혹은 그냥 피곤하면 멈추고, 맘이 가면 더 가면 되지'라는 아주 즉흥적이고 편안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다.
뭐 사실은, 아는 바가 없었고, 선행학습이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냥 남들 장단에 같이 맞춰 온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를 꼭 끝내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도 없었다. '안되면 버스 타던가' 아니면 '힘들거나 재미없으면 중간에 가지 말던가 '라는 식으로 남이 보면 안이할 수도 있는 마음가짐으로 걸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확고히 정한 목표는 있었는데, 그건 '절대 완주에 대한 부담을 갖지 말자'와 함께 '남은 거리에 신경 쓰지 말자'였다. 전자는 약간 실패하였지만, 후자만큼은 제대로 지켰다. 길을 걷다 보면 이정표에 산티아고까지 앞으로 몇 킬로 남았다고 쓰여있는데, 난 그것을 의도적으로 보려 하지도 않았고,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순례길을 걸으며, 난 시험기간에 벼락치기하는 학생 심정으로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목표치를 정하고 걷기는 했으나, 언제라도 멈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이런 즉흥적인 순례자인 나에게 시련을 주는 구간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이다.
까리온에서부터 다음 마을인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에 이르는 17km의 긴 메세타(Meseta :평균고도 약 600m의 고원대지) 구간은 식당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 매점도 없이 길고 지루한 구간만 펼쳐진다. 그러니 멈출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그 길을 걷기 위해 난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고 준비라는 것을 해야 했다.
전날 사순절 행사로 인해 온 동네 상점들이 문을 닫았으나 유일하게 열린 슈퍼마켓을 찾아 오늘을 위한 음식을 샀다.
(또한 기특하게도 피곤해서 지쳐있을 다른 순례자를 위해 여유 있게 음식 장만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넉넉하게 물통에 물도 담고, 샌드위치와 과일을 챙겨서는 그렇게 길을 나섰다.
귀염둥이 삼인 방중에 한 명인 환이와 같이 새벽길을 나섰는데, 이때는 둘 다 아주 피곤에 절어있었다.
근래에 계속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다, 지난밤에는 상희 씨와 수다로 밤늦게 잠들었으니 피로에 피로가 겹쳐졌고, 환이도 역시 피로가 누적되었으니, 둘이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자면서 걸었다.
좀비처럼 영혼 없이 걷는 와중에 중간에 쉼터를 만났다. 여름인 성수기에는 여기에 간이매점이 있다는데 이날은 매점의 ㅁ자도 보이지 않고, 그냥 텅 빈 피난처이다. 거기서 둘 다 벤치에 앉아 낮잠을 잤다.
벤치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선잠을 잤긴 했지만 30분 정도의 쪽잠으로 그나마 약간의 회복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서는 눅눅하고 질긴 빵에 하몬과 치즈를 넣어 만든 보카디요(샌드위치)를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으려니까 상희 씨와 귀염둥이 삼인 방중 나머지 두 명인 현과 민이 다가왔다. 환이를 현과 민에게 바통터치를 하고 지루한 나머지 메세타 구간은 상희 씨와 걸으며 지루하지 않게 걸었다. 혼자 와서 좋은 점은 누구 하나에게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썸'이라....
상희 씨가 스페인 훈남과 카미노를 걸으며 썸을 탄 이야기를 들으니 재미있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카미노 프랑스길에서 지루하기로 제일 악명 높은 이 구간을 그녀의 '썸' 덕분에 재미있게 걸었다.
무엇보다도 흐린 날씨가 도와주었다.
만약, 덥고 햇살이 쨍쨍한 날에 이 길을 걸었으면 난 그야말로 녹아내렸으리라.
메세타 구간을 벗어나 처음 마주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파나마에서 온 가족들이 운영하는 이 식당은 기나긴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로 인해 만석이다. 어쩜 순례길 전체에서 제일 목 좋은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이 집에서 유난히 맛있던 미트볼..
완자 크기만 한 미트볼에 치즈 향 가득한 로제 소스를 뿌려주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또 가게 되면 꼭 거기서 다시 그 미트볼을 먹겠다는 다짐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순례길을 걷겠다고 맹세한 게 엊그제 일인데도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맛이기에 그런 헛된 다짐을 했나 보다.
점심을 먹고는 길을 다시 길을 나섰다.
보통 사람들은 다음 마을인 레디고스(Ledigos)에서 멈춘다는데 이상하게 이날은 더 걷고 싶어 졌다.
그래서 레디고스에서 머물겠다는 상희 씨를 두고는 나 혼자 길을 재촉했다.
그러니깐 예전부터 길게 걷겠다는 야망은 있었다.
순례길을 가기 전 한 예습이라고는 블로그 이웃들의 글을 읽어본 게 다이다. 그중 두세 분의 글은 탐독해서 열심히 읽었는데 그중 한 남자분의 글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디테일하거나 장황한 글은 아니지만, 무채색에 가까운 담백하고 솔직한 글이어서 맘에 들었던 포스팅이다. 그때 그분이 하루는 40km 걸었는데, 그게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나도 왠지 욕심이 났다.
그냥 걷고 싶었고, 걷는 게 좋았고, 늦은 오후에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 쫄깃함이 좋았는 데다, 그도 그만큼 했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리고 그 욕심을 조만간 실천에 옮기리라 야심을 불태웠다. 며칠 전부터 체력이 아주 좋아졌고, 이 전에 여행했던 모로코에서 가출했던 나의 무릎 연골도 돌아왔고, 비록 왼발은 너덜너덜한 상태지만 그 고통이 많이 익숙해져서 아픔에 강해졌다.
그리고 오늘, 그놈의 마법의 날도 끝났으니 도전해보자!!
그래서 그냥 걸었다.
중간 마을에서 쉴까 생각도 했지만, 피자 한 판 거하게 해치운 뒤 기력을 회복해서 또 걸었다.
오후 늦도록 따가운 햇살에 지겹도록 걸었다.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생각 없이 걸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이란 표현이 뭔 뜻인지 정확히 알 것 같다.
그렇게 걸으니 정말이지 발바닥에 열이 후끈후끈 나더라.
특히 사아군 마을 근처에 다가오면서부터는 정말이지 어디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고 싶었다. 그런데 앉아 쉴만한 곳이 전혀 없어서 그냥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햇살이 비스듬히 비켜내리는 늦은 오후 6시가 넘어서야 사하군 마을에 도착했으니 12시간 가까이 걸은 셈이다.
뭐 중간중간 쉬기도 많이 쉬었으니 12시간 내내 걸은 것은 아니지만,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은근 뿌듯한 날이었다. 무념무상으로 그렇게 40km를 넘게 걸었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아는 얼굴이 전혀 없다. 뭔가 낯설고 어색하지만, 모처럼 묵언수행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빨고는
알베르게 리셉션에서 일하는 언니를 도와줬다.
그 스페인 언니는 마을에 대한 한국어판 안내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컴퓨터로 번역을 했기에 띄어쓰기가 난해하게 되어있었고,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이 언니가 편집을 하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는 글자가 아닌 그림 이리라.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에 넋두리를 해댔으니 나야 안도와 줄려 해도 안도와 줄 수가 없었다.
일단, 간략하게 국어 구조를 설명해주고 자연스럽게 편집할 수 있도록 도와는 줬다.
오역이 있기는 했지만 양이 너무 방대해서 다 봐줄 수는 없었는데, 아마도 내 다음에 오는 한국 순례자들한테 품앗이로 도움을 받는다면 언젠가는 한국인 순례자들이 완성된 한국어 안내서를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게 근처의 식당에서 대충 타파스와 와인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수십 명이 지내는 알베르게에 순례자는 고작 20~30명뿐인 데다가 아는 이 하나 없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요함인가.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혼자 있으면 외롭다가도 여럿이 어울리면 그 또한 피로감에 혼자 있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딱 그 타이밍, 적절한 순간에 오롯이 혼자만의 평화로 잠이 들어본다.
근래 계속 잠을 푹 못 자서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이상하게 순례길에서는 계속 악몽을 꾸거나 선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피곤이 누적되었는데 지난밤 수다로 3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했으니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렇게 피곤할 때, 더 피곤하게 스스로는 만드니 나도 참 변태스럽다.
그렇지만, 요리 몸을 혹사시키고 나야 왠지 오늘 밤은 정말 꿀잠을 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그날 밤은 고요한 알베르게에서 달달한 숙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