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날: 레온(Leon)까지 25km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렐리에고스(Reliegos)에서 레온(Leon)까지 25km
아침 출동 준비를 하면서부터 수다 삼매경에 새벽 일찍 출발은 글러 먹었다.
알베르게를 나오자마 산티아고로 가는 노란 화살표를 찾아 헤매고 있는 수잔나를 발견하곤 그녀를 잡아다 같이 길을 나섰다.
스페인계이지만 영국 이민자인 탓에 영어와 스페인어를 능수능란(제일 부럽다) 하게 하는 그녀는 화끈한 큰언니 타입이다. 또 다른 순례자 카미말로는 나랑 그녀랑 친근한 성격이 많이 닮았다는데,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내가 그냥 커피라면, 수잔나는 티.오.피.
내가 사람들하고 관계가 주접 똥꼬 발랄하다면, 그녀는 거칠고 화끈하고 끈끈하다. 내가 뒤 동네 쭈구리 양아치라면, 수잔나는 그야말로 구역에 우두머리이고 대빵인 성격이다.
그래도 둘 다 길에서 주접떠는 데는 별 부끄러워하는 타입이 아니라 같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걸었다.
물론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서는 동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지금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고, 까미노를 걷는 동안 관계에 대해 심사숙고할 것이라고 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그녀와 재회했을 때,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고 그 결론은 그와의 이별이었음을 일단 밝혀둔다.)
다음 마을인 만시야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길가는 한 남자를 붙자고는 근처 카페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가다 보면 당연히 나올 카페인데 왜 물어볼까라는 생각을 할 찰나, 그녀는 나에게 헤드락을 걸듯이 내 목을 팔로 감고는 복화술 하듯 속삭였다.
"웃어봐 봐, 저 남자 보고 웃어보라고"
일단 억지웃음을 짓고는 그 남자를 쳐다봤는데, 억지웃음이 스르르 히죽거리는 미소로 바뀌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얼마나 잘생겼던지... 게다 방금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했는지, 다부진 몸매에서 향긋한 비누 향기가 났다.
스페인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스페인 남자가 잘생겼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훈훈하게 생긴 남자는 많이 봤어도 진짜 잘생긴 남자를 보지 못했는데, 오늘 비로소 잘생긴 남자를 보는구나! 게다 나를 포함해서 풀풀 땀 냄새에 찌든 순례자들과 있다가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니 그 남자의 미모와 함께 상큼한 향기가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 우리는 10대 소녀들 마냥 까르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진짜 잘생겼지?"
"어, 너 그래서 말붙인겨구나?"
"그럼. 그 미소 봤냐? 진짜 이쁘지?"
"응. 게다 그 향기... 쫓아가고 싶더라"
그녀와 걷는 중간에 아프리카 말리에서 온 무하메드와 동행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 온 순례자는 이로써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인데 첫 번째 순례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까먹었다. 여하튼 둘 다 스페인에서 유학 중이었다. 잠시 셋이 걸었지만 휴식을 위해 그들과 헤어졌다.
"이따, 레온에서 순례자들 다 같이 모여서 저녁 먹으러 갈 거니깐 저녁 6시에 대성당 앞에서 보자" 라는
그녀의 초대에 난 완곡히 거절했다.
"글쎄, 나는 다른 친구들과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있어서... 친구들한테 물어볼게, 혹시라도 가게 되면 문자 보낼게"
오늘 목적지인 레온에서 하비와 안드레를 만나기로 했는데, 안드레는 잘 모르겠지만 하비는 그리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니, 보나 마나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도 이제 대규모 그룹의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젠 대도시도 싫어졌다. 스페인의 시골길, 작은 마을이 주는 편안함에 익숙해졌는지 대도시의 큰 기운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산티아고 가기 전 마지막 대도시인데 왜 이리 내키지 않는 걸까?
수잔나와 무하메드와 헤어진 뒤 아주 오랫동안 혼자 걸었다. 레온까지 가는 많은 부분은 지루한 찻길을 걷는 거였고, 그 지루함에 맞추어 떠오르는 생각들도 아주 지루하게 흘러갔다.
까미노 길의 후반부에 오니 이것저것 잡생각이 많이 나온다.
수잔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레온에서 이틀 밤을 지낸다고 하는데, 나도 그들처럼 휴식을 취해볼까 하다가 쉬지 않고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체력은 밤낮 걸어도 문제없이 좋은데, 이놈의 왼발이 참 말썽이다. 새끼발가락의 터진 생살은 쉬 나을 생각을 안 했고 하루 이틀 쉰다고 호전될 것 같지도 않아 차라리 산티아고에서 푹 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 외에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길을 걸었다. 정작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들은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온갖 잡념들로 가득한 시간이다.
레온에 도착하기 직전의 마을에서도 어김없이 바에 들렸다. 여태 마을에 있는 바들을 다 다녔지만, 이곳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순례길에서 살짝 비켜난 뒷골목에 위치한 바였는데, 분위기가 순례자들보다 현지인들을 위한 바처럼 느껴져 숨은 현지 맛 집을 발견한 마냥 뭔가 기분 좋은 곳이었다. 맥주와 함께 타파스를 주는데도 불구하고 점심도 해결할 겸 미트볼도 시켰다. 그런데, 맛이 넘나 좋다. 뭐가 떡갈비 먹는 기분이다. 군데군데 살짝 탄 부분이 아주 바싹해서 식감이 최고였다.
"맛있니?" 그 작은 식당의 요리사겸 바텐더겸 주인이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응. 직접 만든 거야?"
"그럼, 여기 음식 내가 전부 다 만들어"
"대박~, 이거 여태 먹은 것 중에 최고야"
"그렇게 맘에 든다면 너 나한테 시집올래?"
"좋아, 네가 요리를 잘하니 결혼하겠어"
"그럼 오늘부터 여기서 자는 거다"
"일단, 산티아고부터 가고. 순례길을 끝날 때까지 네 음식이 생각나면 그때 돌아올게, 그러면 우리 결혼하자"
주인 아저씨와의 시시껄렁한 농담도 재미났다. 여타 다른 바에서는 매번 순례길을 배경으로 한 대화를 하는데, 이 집은 마치 동네 마실 나온 것 마냥 일상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여기 뭔 일 있어? 일요일도 아닌데 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온 동네 마을 사람들이 골목에 가득 차있길래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봤다.
"장례식,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저런, 어쩌다가?"
"노환이지, 82세나 사셨으니"
"아~"
미사가 끝났는지, 동네 아재들이 쭈르륵 그 작은 바에 가득 차게 밀려들어왔다.
그러고는 구석에 찌그러져 앉아있는 동양 처자를 보더니, 격려와 함께 응원을 보내줬다.
아주 잠시지만, 동네 아저씨들과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마치 내가 그 지역의 주민이 된 마냥 친근함을 보내주는 그 공기가 참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현지인이 된 거 마냥 스페인에 익숙해졌다.
잠시 레온을 스치고 다음 마을로 가버릴까 하고 갈등을 때리다가 안드레의 문자를 받고는 그냥 레온에서 지내기로 했다. 수도원옆에 붙어있는 공립알베르게에 여장을 풀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자유시간을 갖는다.
보통 때 같으면, 동네에 뭐가 있나 탐정놀이를 나서겠지만, 이제 이것도 지겨워졌다. 레온의 유명한 대성당도 내일 카미노 길을 걸으면서 봐도 되니깐 오늘은 건너뛰어도 될 것 같았다. 한국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는 중국 뷔페인 Wok에 많이 들 간다는데, 별로 먹고 싶지도 않다.
안드레와 하비에게 레온에 가면 그동안의 음식에 대한 답례로 한국 음식을 만들어준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막상 와보니 이 알베르게에는 요리할 수 있는 취사시설이 없다. 그래서 은근슬쩍 그냥 넘어갔다. ㅋㅋㅋ 요리하기 귀찮았었는데... 잘되었구나~
레온의 도시 탐정놀이도 귀찮아 그냥 잠시 슈퍼만 다녀오고는 숙소 앞 광장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이번 멤버는 하비, 안드레, 조던, 엠마 그리고 나.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이날 말이 제일 많은 것은 나였다. 대부분 내 여행 이야기를 경청하였고, 아랍문화에 이해가 싶은 하비와 함께 아랍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특히 이번 스페인 여행 직전에 다녀온 모로코에 대해서 따끈따근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조던이 유난히 관심을 많이 가졌다.
결국 조던은 카미노를 빨리 끝내고는 모로코를 가야겠다며 레온에서 하루 더 쉬기로 한 계획을 바꾸고 다급한 일정으로 변경했다.
서른 살 초반이 조던은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했다. 여자 친구라고 부르지 않고 만나는 여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 아직 깊은 관계가 아닌가 보다. 여하튼 그는 가정을 갖고 아이를 가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데, 그것을 위해 지금 만나는 여자와 발전된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아직도 세상을 더 보고 싶고, 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다.
장소를 옮겨 왁자지껄한 먹자골목 광장에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얼큰한 찌개가 먹고 싶어서 벼르던 참에 드디어 카요스(callos)를 먹어보게 되었다. 소곱창이랑 내장을 넣고 칼칼하게 끓인 스튜인데, 혼자 먹기에는 가격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일행이 있어서 먹어보게 된 것이다.
예전에 스페인 친구 페르민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린 전국 일주를 하며 먹방을 찍어댔다. 그때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먹었는데, 각종 내장이 들어있어 외국인인 그에게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웬걸 한 그릇을 뚝딱해치웠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스페인에도 이런 음식 많아"였다.
그때 외워둔 음식 이름 카요스, 약간 곱창전골스러운 느낌이다. 한국 음식처럼 맵상한 맛은 나지 않지만 그런대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밥이 아닌 빵에 찍어 먹기에 살짝 이상하긴 하지만, 와인과 먹는 술안주라고 생각하면 빵 없이도 참 맛나게 먹을 수 있다. 그리고는 후에 수퍼에서 통조림에 든 카요스를 발견하곤 곱창볶음이 생각날때마다 사먹었다. 라면스프나 매운 고추를 넣어 먹으면 칼칼한게 그럴듯한 한국음식이되었는데 힘든 순례길에서 나에겐 향수를 달래주는 영혼의 음식이 되었다.
이젠 순례길도 또한 순례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처럼 익숙해졌지만, 식당에서 음식을 고르고, 주문을 시키고, 바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주 익숙해졌다.
이렇게 스페인에 물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