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이라기엔 모자란 후기
책임의식과 권리, 파괴된 전통가족구조
가족을 형성하는 것, 가족이 형성되는 것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충동이 아니다. 아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출생은 이루어진다. 보통의 경우 아이의 부모는 정해져있다. 그렇기에 부모-자식 사이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자식의 입장에선 피동이다. 영화는 먼저 이 구조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 보육시설의 베이비박스는 ‘상현’의 세탁소 차량으로, 바퀴달린 베이비박스로 진화하며 영화의 내러티브가 시작된다. ‘우성’과 미래의 가족이 될 부모와의 관계는 더 이상 피동이 아니다.
교회에서 베이비 박스를 담당하던 ‘동수’는 봉고의 제멋대로 열리는 트렁크를 줄로 당기며 전공을 이어간다. 바퀴달린 베이비박스도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들어오는 아이를 거부할 수 없고, 이미 보육원에서 피입양자에게 선수 영입제의를 하며 피동의 상태를 벗어난 ‘해진’도 탑승자격이 있다. 마지막 구성원이 맞춰진 봉고탑승자는 공통된 특수임무를 서로 일정부분 분담한 가족이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이상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여기서 남성성은 원시시대부터 이어져온 남자의 힘이 주축이 된 남성성이 아니다. 책임이다.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책임의식이다. 첫 번째 가정을 지키지 못했던, 책임의식을 저버리고 남성성을 잃은 ‘상현’은 그 값을 두 번째 베이비박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혀가며 치른다.
여성성은 출산과 육아다. 하지만 더 이상 출산과 육아는 어머니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서로에게 충분조건이고 필요조건이다. 육아를 포기한 ‘소영’은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입양모는 ‘우성’의 친모인 ‘소영’의 눈앞에서 ‘우성’에게 수유를 하며 어머니의 역할을 분담한다. 가족구성원들은 그 권리계승을 놀란 듯 목도하지만 수긍한다. 여성성은 이제 분담가능하다. 가족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까.
‘소영’은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어머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아버지(남성성, 책임의식)를 찾아가는 로드무비다. 엔딩 장면에서 알 수 있듯 그 아버지는 한 명이 아니고 남자도 아니다. 출소 후 ‘소영’의 직업이 주유소 직원인 것은 바퀴달린 베이비박스로 시작된 여정의 연료를 스스로 채워 다시 출발하는,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남성성과 책임의식을 분담하는 메타포로 보여진다. 그래서 칸 영화제에서는 이 영화가 던져주는 남성성, 즉 가족을 지키려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책임의식에 남우주연상을 수여한 것은 아닐까. 수상은 대표로 한명이 받은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