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평안함의 파도 속에서 서핑하기
작년 겨울 일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온 뒤 한겨울인 12월에 본격적인 백수가 되었다. 가장 걱정한 것은 너무 춥고 고독하지 않을까? 였는데 걱정보다는 훨씬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남자친구와 함께 컨셉을 잡아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말하자면 ‘서로 사랑하지만 가난한 90년대 커플의 겨울나기’ 컨셉이었다. 추우면 옷 껴입고, 보일러를 켜는 대신 국물요리를 끓여 집을 덥히고, 치킨 먹고 싶으면 닭 정육을 사 와 구워 먹는 등 생활비를 극단적으로 절약했는데 무얼 하든 '우리의 컨셉을 기억해라' 라며 농담처럼 즐기다 보니 궁상맞지 않고 재밌는 놀이가 되었다. 장단을 잘 맞춰준 남자친구 덕도 있었고, 둘 다 어떻게든 돈을 아껴서 더 오래 쉬고 싶었던 것도 한몫했다.
30대 후반 백수 두 명의 하루 주요 일과
1. 마트 전단지에서 이번주에 사야 할 가장 저렴한 식재료 및 메뉴 연구
2. 묵혀뒀던 공간 정리하며 안 쓰는 물건 당근하기
3. 재료가 상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냉장고 재고 확인
4. 낮에 기온이 가장 따뜻한 시간대를 체크해 산책하기
태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여서 온갖 향신료를 무더기로 사 온 터라 집에서 태국식 전골 요리도 자주 해 먹었다. 주방 쪽의 테라스를 창고 겸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바깥으로 공기가 잘 통해서 고기 요리를 해 먹기에도 좋더라. 다만 엄청 추운 공간이라 겉옷을 입고 장갑을 낀 채 거의 야외에서 먹는 것처럼 가스불을 쬐며 밥을 먹었다. 이 전골요리가 우리의 컨셉의 결정체였는데 꽤 맛있고 재밌길래 몇 번은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해먹기도 했다. 그들에게 '여기서 먹을 거야' 라며 추운 테라스를 열어 보이면 다들 굉장히 당황해했지만, 양말과 장갑을 입히고 겉옷을 챙겨 오라 한 뒤 전골을 끓이기 시작하면 점점 재미를 붙여 전골에 볶음밥과 술을 거나하게 먹고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딱 한 달 동안 그렇게 놀다가 갑작스러운 이사와 이직이 겹쳐 생각보다 빠르게 백수 생활이 청산되었지만, 원체 겨울을 싫어하던 나에게 이 12월의 백수 생활은 특별했다. 추운 날 종종거리며 출퇴근을 하느라 겨울을 싫어했을 뿐, 겨울은 꽤 재밌는 계절더라. 맘 편히 잘 놀았기 때문인지 12월은 아무 불안감도 없이 너무나 평안하고 배부르게 지나갔다. 보일러를 끄고 평균 10도에서 지냈지만 감기 한번 걸리지도 않았다.
백수 생활에서 생활비 절약을 위해서는 컨셉이 꽤 도움이 되더라, 라는 것 말고도 배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돈이 없어도 즐길 거리는 어디에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이 조금 궁상맞아도 마음가짐에 따라 사람의 기분은 달라질 수 있다. 현실이 쭈글쭈글해도 마음까지 쪼그라들어있지 않다면, 빵빵하게 채워 넣을 즐거움은 어디에든 있다. 불안과 걱정이 넘칠 때마다 주변에서 재밌는 걸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야지. 돈은 많지 않아도 즐거움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지. 인생에는 백수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힘겨운 고비가 많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