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불, 물, 고양이, 개, 설탕, 빛의 영혼처럼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파랑새'는 내가 본 '양손프로젝트'의 두 번째 공연이었다. 팸플릿에서 보고 알았는데 내가 본 첫 번째 공연이 양손에게도 첫 공연이었더라. 2011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했던 '개는 맹수다' 연극을 처음 볼 때, 나는 그 근방에서 열렸던 예술축제인 '프린지 페스티벌'의 자원봉사자였다. 하루에 몇 개의 공연을 봉사자의 신분으로 무료 관람할 수 있었는데 나는 개는 맹수다 공연을 선택했고, 그 후로 무려 14년이나 지났지만 지금까지 제일 좋아하는 연극 공연으로 '개는 맹수다'를 꼽는다. 그 뒤로 몇 번이고 그들의 연극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았는데 이번에 드디어 '파랑새' 티켓팅에 성공했다.
‘돌고 돌아온 집에 그토록 원하던 파랑새가 있었다’,라고 요약되는 파랑새 원작이 그리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았다. '소중한 것은 결국 일상에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다', 이런 류의 문장은 너무 자주 우리 주변을 스쳐간다. 파랑새도 그중 하나로 기억되고 잊혔다. 큰 기대 없이 연극이 시작되었고, 5분 만에 나는 울기 시작해서 끝날 때는 거의 흐느끼기까지 했다.
양손프로젝트는 미니멀 연극을 추구하는 연극 팀이다. 텅 빈 무대에 의자 두 개가 놓여있는 것이 그들의 주된 연극 공간이다. '파랑새' 역시 세트는 오직 의자 두 개뿐이고 배우가 이야기꾼의 역할을 수행하며 의성어와 손짓으로 상상 속 배경을 완성한다. 행복의 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온갖 웃음소리와 통통 튀는 작은 요정이 가득한 정원에서 날 법한 소리를 계속 입으로 내는 방식이다. 여기에 조명과 약한 효과음이 곁들여진다. 이것만으로 놀랄 만큼 관객은 배우의 이야기에 몰입되고,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장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묘사한다고 느꼈고, 소리와 손짓만으로 관객은 각자의 상상 속에서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행복의 정원, 미래의 왕국을 지어냈다. 추억의 나라에서는 안갯속에서 집과 사람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다시 작별하는 장면을 마치 눈으로 본 것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실제로 본 것은 오직 두 명의 배우뿐이었는데도.
연극 속의 등장인물은 당연하게도 두 명이 아니다. 함께 여행하는 사물의 영혼만 해도 빵, 불, 물, 고양이, 개, 설탕, 빛이다. 주인공 '틸틸'과 '미틸'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 영혼들은 요정에게 빌린 모자 덕분에 볼 수 있게 되었고, 여행이 끝나면 그들의 눈은 다시 닫히게 된다. 이 영혼들의 존재가 마치 연극과도 같다고 느꼈다. 볼 수 없는 것을 한 시간 반의 연극 안에서는 잠시 엿본 기분이 든다. 텅 비어있는 무대에서 잠시나마 튀어 오르고 날아다니고 빛나는 사물들의 영혼이 보였다고 믿는다. 한 번 엿본 세상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살찐 쾌락과 작고 소소한 행복, 커다란 기쁨이 있었던 행복의 정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본질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정의 모자를 사용하자 몸집이 크던 쾌락들은 쪼그라들고 수치심으로 변해 숨어버리고 대신 틸틸과 미틸의 낡았지만 깨끗한,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집에 함께 살던 작은 행복이 모여든다. 뒤따라온 커다란 기쁨들은 틸틸, 미틸과 함께 온 빛의 영혼을 반긴다. '우린 너무 행복하지만 우리의 그림자 너머, 우리의 꿈 너머는 볼 수 없다'라고 말하는 커다란 기쁨들은 한계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행복들이 왜 우냐고 묻는 틸틸에게 빛이 대답한다. '너희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단다.' 단순하고 과대평가된 쾌락, 작지만 단단한 일상의 행복, 크지만 금방 사라지는 커다란 기쁨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번에 알았는데 '파랑새' 원작은 동화나 소설이 아닌 희곡이었다. 주인공 이름으로 대부분 알고 있는 치르치르, 미치르는 일본 번역의 잘못된 이름이었고 실제로는 틸틸과 미틸이었다. 어렸을 때 읽고 모두 잊어버린 파랑새 원작의 아름다운 재해석인 점도 매력적이었다.
최근 영화관에서 재개봉한 '더 폴' 영화를 보면서도, 그리고 이번 '파랑새' 연극을 보면서도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힘은 대단하다. 사람은 오래도록 걸어 사냥감을 지치게 만들도록 설계된 종족이라는 글을 봤다. 그처럼 DNA에 잠재된 어떤 특징이 있다면 이야기 또한 우리의 종을 아우르는 특성일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서로에게 들려주도록 만들어졌다. 그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을 꿈꾸고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한다. 연극도 소설도 모든 세상의 작품들도 결국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업이라는 것을, 양손프로젝트 연극을 볼 때마다 새삼스레 느낀다. 그들이 텅 빈 연극 무대를 꽉 채우며 들려준 파랑새라는 이야기에 오랫동안 몰입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