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출산소식을 듣고 눈물을 쏟은 지 열 달째다.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데 장장 한 달이 지나서야 알현 기회가 왔다. 일개월차 생명체는 새삼스럽고 신비로웠다. 작은 입으로 먹고 더 작은 똥꼬로 싸고 트림도 하고 방귀도 뀌더라. 가끔 트림과 방귀를 동시발산하는 개인기도 보여주더라.
갓난쟁이의 분화 여정에 빠져든다. 보노라면 이토록 아름다운 분화가 어디 있을까 싶다. 마치 내 삶의 전부인 양 한없이 스며들며 가끔 눈물이 핑 돈다.
내 새끼도 저런 날이 있었다. 비록 까무룩 해졌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니 아쉬움이 많다. 새로 만난 갓난쟁이의 분화가 새삼스러운 건 제공해야 할 역할에 대한 반성이다. 사랑으로 퉁쳤던 게으름들 분화를 놓쳤던 무지들 그 밖에 많은 것들.
큰 아이는 결혼할 때 무자식을 선언했다. 부모 의견이 중요하지 않으니 알았다 했다. 그런 마당에 내 삶에서 인간 분화를 가까이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지.
지난날의 아쉬움과 마지막일 수 있다는 명분이 돋보기를 들게 한다. 돋보기 속에서 내 딸의 어린 날과 졸린 눈을 참으며 딸을 어르던 내 젊은 날이 겹친다. 그날의 피곤을 이기지 못해 놓친 순간들이 소용돌이치고 그걸 후회하는 지금의 내가 있다. 다 담아야지. 빼놓지 않고 저장해야지. 까무룩 한 기억 어르듯 마지막 사탕 녹여먹듯 돋보기 속 분화를 보고 또 본다. 어느 순간은 감동이고 어느 순간은 박장대소다. 모든 순간순간이 어쩔 줄 모르게 달콤하다.
여린 생명체가 내 품에서 분유를 꿀떡 인다. 허공을 휘젓는 손에 손가락을 쥐어준다. 꽃잎 같은 손이 내 손가락을 품어 다문다. 나는 저를 품고 저는 나의 일부를 품은 꽃 봉오리 안에서 전류가 흐른다. 행복하다.
서로의 눈을 마주한다. 전류가 행복한 거냐 묻는 듯 아가의 시선이 내 눈에 고정된다. 고정된 눈동자는 일체의 깜박임도 없이 단호하다. 순수한 블랙홀이다. 나는 기어이 고해성사를 한다. 그래 내가 니 할미란다.
육십 간지. 순환의 처음과 끝에서 우리가 만났다.
환갑이 되었을 때 내 기분은 붕 떠 있었다. 오래 낯을 가렸던 아줌마라는 호칭도 겨우 받아들였는데 환갑이라는 더 센 놈이 또 쳐들어온 느낌이랄까.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되었다. 정신없음. 내가 받아들인 할머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저 호칭이 아닌, 빼박 할머니란 사실은 오래 실감 나지 않았다. 내게는 환갑이란 나이와 할머니로 변경된 신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혼란이 있을 뿐이었다. 내면은 그렇지 못한데도 기꺼이일 것인가 기쁘게 일 것인가?를 정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할머니 된 감정이 기쁜 건지, 기쁜 척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그때 한 달짜리가 내게 질문을 던진 거다. 그래서 내가 싫어요? 들킨 기분이 들었고 그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그래 할미가 잘못했어. 뒤 끝없이 항복을 선언하고 충성맹세까지 바쳤다. 150ml 우유를 해치우는 동안 단 한 번의 깜박임도 없는 초인적 생명체 앞에서 어찌 거짓을 아뢰오리.
움츠렸던 가슴과 쥐었던 주먹을 펴는 것, 항복이란 그런 것이다. 항복을 하고 보니 모든 게 쉽게 흘렀다. 내게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그 걸 받아 줄 대상이 새로 생겼다는 것. 충분하다. 게다가 우리는 처음과 끝에서 서로 잇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품은 무한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이를 육십 간지 필연이라 정돈했다.
정돈된 마음으로 손녀와 나 사이에 기단을 놓는다. 기단 위로 애와 정이 쌓일 것이다. 책임으로부터 한 발 물러난 나는 사랑만 줄 것이다. 딸아. 나와 쌓은 바벨탑은 이제 네 딸과 쌓아가거라. 이제 에미 심정을 알게 될 날도 머지않았구나. ㅋㅋㅋ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돈'을 의미한다.
*어느 시기를 거치면 자식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 신' 행세를 시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