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만실에서 발견한 모성

by 떼굴

딸이 봉투를 내민다.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어떤 예고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봉투 크기로는 내용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설날이니 용돈이 아닐까 기대할 순 있었다. 그러나 신용카드나 들어갈 사이즈에 용돈을 넣었을 것 같지 않았다. 꿈이라면 모를까 한도 없는 카드가 들었을 리는 더욱 만무했다.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 반으로 접은 종이가 들어있다. 종이를 펼치니 초음파 사진과 손 편지가 왼쪽과 오른쪽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오른쪽 손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된 내가 엄마에게..로 시작되는 문구에 팍 하고 눈물이 터졌다.


아홉 달이 지난 어느 날,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보이스피싱에 거의 털리기 직전까지 갔던 유경험자라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따라 심하게 울어대는 전화를 받고 말았다. 마뜩잖은 목소리를 깐 건 기선 제압용이었다. 두 번은 안 속아.


전화를 건 건 사위였다. 황급히 목소리를 변환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머릿속에선 사위 전화번호가 왜 날아갔나 의문부호가 떠다녔고 그런 와중에 사위가 딸의 출산을 알렸다. 사위가 전한 용건은 목소리로 돌리는 시간보다 빨랐고 내 눈에선 또 눈물이 팍 터졌다.


**가 아기를 낳았어요. 사위 목소리가 달팽이관에서 공회전했다. 우리 통화는 내 눈물을 거두기전에 끝났다. 방금 할머니가 현실과 사위 전화번호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 섞여 감정 파노라마가 빙빙 회전했다. 나는 한 장면을 잡아챘다. 내가 딸을 낳던 날이다. 그날 나는 딸이라는 세상을 얻느라 목숨을 담보했다.


내가 첫 아이를 낳은 건 25살 때였다. 당시는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25살, 앳된 나이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연륜으로 부모가 되기엔 모든 면이 부족한 천둥벌거숭이였다. 천둥벌거숭이가 엄마가 되고 천둥벌거숭이인 줄도 모르고 둘째를 낳은 강남 차병원.


차병원 분만실은 넓은 수술장이었다. 분만대가 마련된 한쪽과 커튼을 칸막이 삼은 침대 여러 개가 한 공간에 있었다. 산모들이 번갈아 산통의 신음을 흘렸으므로 산통음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모두들 죽일 듯 달려드는 산통에 이가 갈릴 지경이 돼야 분만대로 옮겨졌다. 분만대에 옮겨진 나는 간격 없는 통증에 대응할 길이 없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되도록 우아하게 혹은 최대한 경건하게 내 아이를 낳으리라던 의식 의지는 몇 초라도 산통을 줄이고 싶다는 무의식에 묻히고 말았다.


무의식은 점점 산통에 집중했다. 울음이 짐승의 것으로 변하자 곁에 있던 간호사가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때렸다. 그렇게 울면 아기가 위험해요. 우는 호흡에는 아이에게 전달될 산소가 부족해지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이보다 짧고 강한 제압이 있을까.. 간호사는 단 한마디로 나를 제압했다. 쉽고 짧은 순간이었다. 다른 산모들도 줄줄이 같은 방식의 제압을 당했다. 새끼에게 '해가 된다'는 말 한마디면 울음을 싹둑 끊고 후 하 후 하 호흡 가다듬던 차병원 분반실의 산모들. 눈물을 땀으로 변환시켜 출산이라는 역사를 만든 장한 사람들.


그 뒤 나는 모성 발현 장소를 분만실로 꼽았다. 모성의 원천은 자궁이라서 아이가 생길 때 같이 태동해 아이가 출산될 때 아이를 감싸 안고 좌라락 쏟아지던 지점. 내게는 그곳이 차병원이었다고. 그렇게 밖으로 나온 모성은 아이를 키워내는 내내 엄마 곁에 붙어 힘이 되고 위로도 되며 엄마로 생을 마칠 때까지 함께 있는 거라고. 그건 신의 농간이라고. 엄마는 신이 건넨 모성애라는 갑옷을 입고 아이의 뒷배가 돼주는 거라고. 어려도 엄마고 늙어도 엄마인 사명은 그런 연유 때문이라고, 신이 엄마를 엄마는 아이들의 뒷배가 되는 한 인류의 순환은 계속되는 거라고.


허벅지를 때린 간호사가 ‘공주님입니다’라고 두 번째 신호를 보내면 산통은 비로소 끝이 났다. 죽음을 떠올리던 직전의 산통은 오간데 없어지고 땀과 눈물 콧물이 뒤섞인 얼굴엔 말간 미소가 피워 올랐던 1992년 4월 3일. 같은 날 엄마가 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기들이 차례대로 엉엉 울음을 싹 끊고 잇던 그 시공간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끝났다는 안도감 뒤로 수술장 밖에서 마음을 조리고 있을 친정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밥 먹듯 지껄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효녀였던 양 애틋함이 치밀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엄마도 이렇게 배 아파 나를 낳았구나. 하는 동지애였던 거다.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줄 모르고 미물처럼 까불었구나 자각한 날도 그날이었다. 모든 걸 알고도 받아주는 게 엄마라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위 전화를 끊고 딸 생각에 빠졌다. 내 눈에서 터진 눈물의 의미는 뭐였을까.


내 딸은 유난히 겁이 많은 아이다. 그 겁 많은 아이가 30여 년 전 내가 치른 출산 수순을 한치도 다름없이 겪었을 거다. 산모라는 숭고함을 잊을 만큼 아팠을 테고 이러다 잘못되는 건 아닌가 무서운 생각에 다다랐을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밑도 끝도 없이 심장이 아팠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사람들. 목숨도 아깝지 않게 던질 수 있는 사람들. 어떤 작정이나 다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사람들이 엄마다. 내 딸도 엄마라는 특화된 사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이 발부되었다. 모계사회로 입장한 딸은 손녀 손에 있는 모성을 품어 자신만의 힘으로 키울 거다. 또한 이미 익숙한 사람들과 연대할 것이다.


나와 줄곧 싸우기만 하던 딸이 돌연 제 남편보다 엄마가 더 소중하다고 고백하는 바람에 어리둥절했었다.

차병원 분만실에서 엄마에게 역류했던 내 감정과 비슷한 결일 거라 추측한다. 다만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부모 입장이 되고 보니 내 사랑의 대부분은 새끼를 향한 물길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아기를 재우고 나온 딸에게 물어보았다. 아직도 그래?

지금은 셋으로 공평하게 나눠졌어.


곁에 있는 남편을 의식한 딸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딸의 사랑도 제새끼에게 뿌리내려야 한다. 엄마 연식이 쌓일수록 더 그래야 한다. 딸아 너를 통해 관계를 시작한 네 딸이란다. 그 딸에게는 순정의 사랑만 주렴. 그러니 딸아 예수를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너도 엄마를 얼마든지 배반하렴.


빼박 할머니로 심연에 빠졌던 시간이 있다. 그 안에는 딸의 지분을 손녀에게 양보할 때라는 명백한 사실과, 대신 딸은 손녀와 바벨탑을 쌓을 거라는 뻔한 예측과, 먼 훗날 그 둘도 여자들만의 계보 안으로 들어올 거라는 신탁 때문에 우리는 결국 하나라는 큰 결론이 들어 있었다.


사위와 통화할 때 터진 눈물은 우리만의 계보를 떠올린 연민의 폭죽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딸의 내리사랑에 기꺼이 합류할 것이다. 한 물이 두물이 돼도 우린 모계라는 우주 속에 공생하는 같은 물이니까.



*딸의 출산 소식을 듣고 적어 두었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