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도쿠'라는 게임이 있다. 예전에 캐나다 있을 때 스위스 친구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해 봤는데 재미있어서 15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숫자 1부터 9까지를 가로, 세로, 그리고 정사각형 안에 겹치지 않고 다 채워놓으면 완성되는 게임이다.
내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게 바로 이 ‘스도쿠’다. 아무리 바빠도 1판은 꼭 하려고 한다. 왜냐고? 운동선수들이 스트레칭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듯, 스도쿠를 하면 그날의 ‘뇌’ 컨디션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이렇게 쓰니까 무슨 월가에서 일하는 애널리스트 같네). 머리 잘 돌아가는 날은 금방 푼다. 하지만 어떤 날은 뚫어져라 쳐다봐도 풀지 못한다. 그걸 보고 판단한다. 오늘은 뇌가 말랑말랑하네! 혹은 망치 대신 써야겠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하루는 ‘뇌’ 상태가 메롱이었는지 아무리 용을 써도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10분 넘고 20분이 지났다. 30분쯤 되니까 오기가 생겼다.
‘이걸 다 풀기 전까지 절대 다른 일 안 할 거야!’
입술을 악 물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40분이 지나고 분침이 한 바퀴를 돌았지만 결국 나는 풀 수 없었다.
‘아! 짜증나...’
분해서일까? 아니면 열패감 때문일까?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세상을 향해 분노를 내뱉었다.
감정에 지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기분도 안 좋았고 일진도 꼬였다.
‘어떻게 해가 갈수록 이렇게 멍청해질까?’
예전에는 콘플레이크 입에 넣으면서도 쉽게 풀었는데 이제는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로 집중해도 풀리지 않을 때가 많다. 원체 승부욕이 세서 그런가! 아니면 이러다 아메바 수준으로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일까? 꼭꼭 밥알을 씹어도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나는 습관처럼 스도쿠를 켰다. 강제 종료해서 그런가! 어제 못 푼 스도쿠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다른 판으로 새로 시작할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풀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그렇게나 머리 아프게 했던 문제가 요상하리만큼 술술 풀리는 거다. 너무 간단하잖아. 이걸 왜 몰랐지? 결국 3분도 안되어서 한판을 끝내버렸다. 빼곡하게 채워진 숫자를 보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어떻게 된 거지? 하루아침에 IQ가 높아진 것도 아닐 텐데.’
그때 느꼈다. 마냥 붙잡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그날그날 뇌 컨디션도 조금씩 다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속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가 내 뇌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내야지! 아직 내가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지! 그런 식으로 계속 주문을 거니 부담 느낀 머리는 알게 모르게 과부하 걸려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대학 졸업식 때 나는 남들처럼 학사모를 하늘 높이 던질 수 없었다. 친구들, 후배들 대부분이 원하는 회사에 취업 성공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말 그대로 백수 신세였다.
4학년 때 여러 방송국에 지원했지만 줄줄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3학년 때 MBC 최종면접까지 간 게 되레 악수였다. 괜히 이 바닥에 대해 좀 아는 척 설레발치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이거야말로 역설 아닌가? ‘우수’한데 왜 ‘불구’ 하대? 차라리 ‘이렇게 귀한 곳에 당신 같은 누추한 분은 모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 (농담이다)
암튼 서류에서조차 떨어져 버리니까 정말 멘붕이 왔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피디야!’
1년에 모든 방송사 통틀어 10명도 안 뽑는데 게다가 같이 피디 준비하는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똑똑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드넓은 백사장에 있는 한 줌의 모래일 뿐이었다. 별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내가 방송국에 들어가는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요원하게 느껴졌다. 이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일반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졸업식 다음날에도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했다. 울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후배들의 촉촉한 시선을 느끼며 뒤늦게 열심히 준비했건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거의 모든 기업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90퍼센트는 서류통과조차 안되었고 심지어는 인적성검사에도 떨어졌다. 자소서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너무 이쪽 스펙이 없었던 걸까? 나름 열심히 살았다 착각했기에 그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말없이 아침 차려주시는 엄마에게 죄송했고 먼저 취업한 탓에(?) 모든 데이트 비용을 내주는 여자친구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취업 박람회를 기웃거렸다. 수많은 중소기업 설명회를 들었고, 한 번은 까나리 액젓 만드는 회사 면접을 보기도 했다. 까나리액젓 한 캅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들이키며 취업만 시켜주면 양치질할 때 물 대신 사용하겠다! 약을 팔기도 했다.
어떻게든 붙어야 했다. 너무 절실하다 보니 평소보다 힘이 들어갔고 면접에서도 이렇게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그때 내 영혼은 염가였다. 창고 정리 폭탄 세일이었지만 그래도 안 팔리니 문제였다. 까나리 반통 가까이 마셨기에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터덜터덜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신장개업 풍선을 바라보았다.
'쟤는 이곳저곳 잘도 팔리겠지?'
나도 누가 돈만 주면 저렇게 하루 종일 흐느적거릴 수도 있을 텐데... 신장개업 풍선이 부럽긴 처음이었다.
그렇게 5~6개월 불가촉천민처럼 생활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합격했다. 근데 정말 신기한 게 한 번 붙으니 연이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몇 개 회사에 동시에 합격한 것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SK 텔레콤’에 입사했다. 거기서 동기들이랑 같이 홍보 영상 만들며 행복한 인턴 생활 하다가 우연히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KBS에서 피디 기자 신입사원을 뽑습니다.>
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마감 30분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10초를 남기고 가까스로 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회사 생활을 했다. 첫 월급이 나왔다. 최신형 핸드폰과 노트북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배가 부른 건지 아니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른 건지 예전만큼 절실하지 않았다.
KBS 필기시험 당일에도 나는 회사 선배들에게 붙잡혀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집에 들어와 기절하듯 쓰러져 힘겹게 눈 떠보니 제길... 8시 40분이었다. 이제 20분 후면 시험이 시작되었다.
‘갈까? 말까? 졸려 죽겠는데... 어차피 떨어질 게 뻔한데.’
‘그래도 마지막 한 번 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끝까지 고민하다가 택시를 타고 고사장으로 갔다. 도착하니 9시 25분, 시험 종료 30분 전이었다. 시험 감독관에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 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빨리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시험지를 받았는데 이런 제길! 서둘러 오느라 필기도구 하나도 안 가지고 온 것이었다. 옆에 있는 지원자에게 빌릴까? 아니면 시험을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책상 안 서랍에 손을 넣으니 누군가 남기고 간 볼펜 한 자루가 있었다. 그걸로 서둘러 논술, 작문을 쓰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일까? 글씨가 꼬불꼬불거렸고 연신 하품이 나왔다.
시험에 붙을 거라고 정말 1도 기대 안 했다. 제대로 준비하나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게 웬일이래? 며칠 후에 필기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말도 안 돼! 진짜 몰카 같았다. 절박하게 매달릴 때는 손을 뿌리쳐놓고는 이제 와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러다 뭐 또 면접에서 떨어지겠지. 설마 날 뽑겠어? 나라도 날 안 뽑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일까? 면접에 임할 때도 예전과는 조금 다른 자세로 임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누가 버튼 누르면 용수철처럼 튕겨나갈 정도로 바짝 긴장했다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면접관 얼굴도 똑바로 볼 수 있었고 날카로운 질문에도 미소로 답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들을 웃기기까지 했다.
‘무조건 붙어야 해!!’
그런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니 시야가 넓어졌다. 면접 후 KBS 본관 계단에 걸터앉아서 샌드위치 먹으며 오가는 직원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자 이팝나무의 잎들이 사각거렸고, 조금씩 주황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다.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웠고 또 아름다웠다.
‘빨리 갈 필요 없어. 힘들면 쉬어가는 거야. 조금 천천히 가도 돼. 괜찮아.’
주문을 외듯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해남 땅끝 마을에서 바람 쐬고 있는데 KBS에서 연락이 왔다. 최종 합격했다고. 그리고 전체 지원자 중에서 1등이라고.
요즘 드는 생각이 우리는 하루하루 너무 절박하게 삶에 매달리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우리만큼 매사에 열심인 민족도 없을 거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후를 준비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번아웃 증후군’을 겪게 된다. 체력과 뇌는 한계가 있는데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너무 무리하다 보니 결국 기진맥진할 수밖에...
지금까지 나는 너무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살았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혹은 스스로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속 달려야 한다! 빨리 결정을 내리고 선택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 계속 직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한 텀 쉬거나 잠시 둘러 가다 보면 지금까지 막혔던 문제가 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으니까. 아무리 절박한 순간에도 ‘꼭 해내야지 말겠어!’ 이런 마음보다 한두 발자국 떨어져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혜도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예전에 한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비에 젖은 사람만이 비의 무게를 알 수 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시련을 겪어보지는 않았다. 분명 내가 힘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비에 젖어본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