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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스 Jul 21. 2023

소수를 위한 정의


     어제 있었던 일이다. 딸이랑 동네 한 바퀴 돌고 있는데 앞에서 한 초로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걸어가더라. 매너 꼬락서니 하고는... 담배 냄새가 싫어서 서둘러 그를 지나치려 하는데, 그 남자는 거리에 담배꽁초를 그대로 버리더니 그 위에 캬아아악! 가래를 뱉었다. 딸과 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 본 것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떠나는 그를 보면서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 한 대 갈겨버리고 싶었다.


    ‘인간아! 니 안방에서도 그럴 수 있냐?’


    저런 인간이랑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게... 그리고 같은 동네 살고 또 같이 세금 낸다는 게 억울했다. 근데 비단 그 인간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아저씨들도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럽게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짓이기더라.


   “아빠! 딴 길로 가자!”

   “어... 그래!”

   옆에 있던 딸이 얼굴을 찌푸리는데 괜히 미안했다. 같은 어른인 게 부끄럽기까지 했다.





     즐거운 산책길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걸 본 이후로는 바닥만 살피게 되더라. 보니까 담배꽁초는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있었고, 굳어서 검게 변한 껌은 아스팔트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도대체 왜 경찰은 단속을 안 하는 걸까? 싱가포르는 벌금 엄청 세다는데 그렇게 하면 길거리가 깨끗해지지 않을까? 시내 곳곳에 CCTV 있는데 그걸 뒀다 뭐 하는 걸까?’     


    걷는 내내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집에 와서 아내랑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적 이슈는 개인의 가치관으로 점점 좁혀졌다.


   “아마 청소년 시절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타고난 인성이 그럴 수도.”

   “혹시 세대 차이는 아닐까? 기성세대들이 많이 그러니까.”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아. 대학가 주변을 가봐.”


    아내 말이 맞는 게 주말에 홍대역 뒷골목을 가보면 각종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널려있는 게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하나 확실한 것은 시민의식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거리는 깨끗하다. 선진국에서 길을 걸을 때는 이곳저곳 주변을 살피며 경치를 즐기지만, 후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시선은 계속 바닥에 머물게 된다. 민도의 차이임이 분명하다.     


  



     운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교차로에서 차선을 바꾸려고 하면 꼭 앞에서 ‘끼어들기’ 하는 차가 있다. 500m 정도 남으면 그나마 이해하겠으나 100m도 안 남은 지점에서 깜빡이만 켜고 무작정 머리를 들이박는다. 물론 실수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 역시 그런 적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습관이 된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남들보다 먼저 가기 위해서, 조금 더 기다리기 귀찮아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새치기를 한다. 더 큰 문제는 한두 명이 그렇게 해버리면 뒤따르던 차들도 따라 한다는 점이다.

    ‘쟤도 하는데 나라고는 못할까?’

    법을 지키면 나만 억울하다! 그런 생각이 만연해진 결과 도로는 금세 무질서 천국이 되고 만다. 이른바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소수부터 시작된다. 소수의 천재가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지만 마찬가지로 소수의 악당이 선량한 사람 전체를 전염시키기도 한다. 거리에 담배꽁초도, 비양심 끼어들기도 몇몇 미꾸라지들이 설친 끝에 온 웅덩이가 뿌옇게 오염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수의 전세 사기범은 전체 부동산 시장을 교란시키고, 소수의 치한 때문에 남성 전체가 ‘잠재적 성가해자’로 간주된다. 소수의 악플러들 때문에 창작자들은 고통을 받고, 소수의 불편러들 눈치 보느라 평범한 사람들까지 불편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언제까지 우리는 ‘소수’의 횡포를 마냥 견디어야 할까?  이제팔짱을 풀 때가 되다 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나는 ‘소수’의 미꾸라지만 잘 걸러내도 전보다는 훨씬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단 처벌이 훨씬 더 세져야 한다. 우리나라 형법은 범죄자에게 너무 관대하다. 상습적으로 음주운전을 한 인간들이 버젓하게 정치를 하고, 아무렇지 않게 연예계 활동을 하고 있다. 사기꾼에 대한 형량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 일례로 미국은 금융사기범에 기본 수백 년 이상 징역을 선고하는데, 우리는 1조 사기범이 고작 15년 형량을 받았다. 싱가포르는 공공적인 장소에서 침을 뱉으면 최소 1,000달러의 벌금이 부과되는데 우리나라는 10만 원 이하로 내면 된다. (호주 역시 최소 한화 81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이렇게 처벌이 솜방망이다 보니 ‘그까짓 벌금 내고 말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 같다.      


    게다가 단속 요원도 늘려야 한다. 나만 그런가! 그동안 단속하는 사람도, 걸리는 사람도 거의 본 적이 없다. 음주 단속하는 경찰은 가끔 봤지만, 거리에 침 뱉거나 담배 버리는 미꾸라지를 잡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비정기적으로 단속요원을 늘렸으면 좋겠고,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시민제보를 통한 포상금 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교육이다. 우리나라 교육은 대학 입결과 취업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시민 교육, 인성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초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이들을 훈육으면 좋겠다.


    내가 어렸을 때 A 선생님은 교실 바닥에 침이나 가래 있으면 꼭 그 범인을 잡아서 청소를 시키셨다. 껌을 씹고 나면 휴지에 넣어버리는 습관도, 뒤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는 것도 그 선생님 덕분 우리 반 아이들 모두 자연스레 익히게 었다.






     최근에 유명 브랜드 아파트 부실 공사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조심스레 예측컨대 향후 10~20년 안에 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날 것 같다.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인들은 안전을 피와 눈물로 배우는 습성이 있으니까.


    나는 모든 건설 회사가 비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처음에는 소수의 몇몇 회사가 몰래 철근을 빼돌리거나 공사비를 횡령했을 것이다. 그걸 감시해야 할 감리는 뇌물을 받고 묵인했을 테고 그 결과 겉만 멀쩡한 아파트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게 점차 소문이 퍼져서 따라 하는 건설 회사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어느 순간부터 ‘부실시공’은 관행이 되었을 게다. 그 결과, 2020년 이후 지어진 신축 아파트는 아이러니하게 그 누구도 들어가길 꺼려하는 공포의 아파트가 되어버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부가 소수의 미꾸라지 건설 회사를 처음부터 제대로 단속했었다면! 비양심 건설 회사에 엄청난 과징금을 부과했었다면, 건설 인력들에게 작업 윤리를 제대로 숙지시켰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같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소수를 위한 정의는 과연 무엇인지..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건지...

   혹시 생활의 빈곤이 마음의 빈곤으로 이어지는 건 아닌지...

   그리고 이미 피어버린 곰팡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부분의 과일은 조금만 곰팡이가 피어도 다 버려야 한다. 멀쩡해 보이는 부분도 이미 포자가 퍼져있으니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곰팡이들과 같이 살 수밖에 없다. ‘공존’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하기 싫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부디 공존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의 유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편의보다 타인의 고통을 좀 더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가 아닌 '대다수'인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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