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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주현 Jul 12. 2021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 사이

혐오표현이 정당성을 얻고 사용될 수 있는가

차별 언어는 '짱개', '쪽바리', '깜둥이', '병신' 등 특정 집단을 비하하거나 소수자를 낮잡는 혐오 표현이다. 사회적 용어는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다. 그 범위는 다양하지만, 부유층이나 빈곤층 등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을 특정 집단으로 묶는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 사이에 걸친 단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백인을 보고 백인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로 외국인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흑인을 보고 나면, 대부분 흑인을 보았다고 특정 한다. 자기도 모르게 백인은 '외국인'의 기본 값으로 생각하고 흑인은 기본 값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태원 클럽에 흑인이 많다, '는 차별적인 표현이다.
 
 '흑형'은 한때 논란에 휩싸인 단어다. 샘 오취리가 흑형이란 단어가 모욕적이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흑형이 우월한 신체능력을 칭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인데 왜 이리 민감하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싫다면 그만두는 게 맞다는 반성이 일어났고, 흑형을 차별 언어로 인식하는 시각이 늘었다. 흑형이 모욕적인 까닭은 아무리 칭찬이라도 그 특징이 왜 피부색으로 드러나느냐는데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흑형을 순화하기 위해 흑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표현도 차별적이다. 피부는 사람을 구분 짓는 특징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모 대학 학생회에서 진행한 인권행사 퀴즈 중 일부


 난데없이 문단 마지막에 차별적이라고 지적한 두 문장은 어느 대학 학생회에서 진행한 페이스북 행사에 나온 표현들이다. 행사는 장애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차별 언어를 순화하자는 의도를 가지고 몇 가지 문제를 맞히면 상품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아쉽게도, 저 두 표현은 올바른 방식으로 소개됐다. 졸업생이 괜한 참견이지 아닐까 하는 고민 끝에 페이스북 메신저로 문제를 제기했다. 하루 뒤, 관대한 학생회는 잘못을 시인하고 향후 행사에서 더욱 주의를 기울이기로 약속했다.(해당 행사는 하루 전에 끝났다.) 뒤이어 해당 표현을 올바르다고 소개한 까닭을 덧붙였다. '흑인'이라는 단어가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인정되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자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통상적인 인정'이 단어로서 사용될 자격을 의미하는지, 혐오 없는 바른 표현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단어로서 인정되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는 혐오표현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혐오표현인지 아닌지 추가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이므로 바람직한 해명이 될 수 없다. 바른 표현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면, 정당성을 따져봐야 한다.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저 대부분의 시민들이 널리 사용한다는 의미라면, 정당화될 수 없다. 혐오 표현에 대한 판단은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그것이 풍기는 뉘앙스,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흑인'은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말일지라도, 피부색을 특정하여 그보다 더 강한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적이나 문화를 지우고 인종적 편견(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든지, 백인보다 머리가 나쁘다든지 등)을 조장하므로 지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부색으로 불리는 것을 불쾌해한다. 따라서, 학생회의 답은 좋은 해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해명에서 한 가지 물음이 생겼다. 흑인은 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동시에 인권위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다. 인권 담론(혹은 정치)을 형성하기 위해선 소수자 집단을 특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목적으로 한 경우, 흑인은 사회적 용어의 지위를 갖는다. 사회적 용어는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학술적으로, 또한 소수자의 결집과 투쟁을 위해 정치적 혹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다.(소수자의 결집과 투쟁은 사회적 용어에 의해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기 보단, 사회적 용어의 지위를 소수자들이 스스로 획득하거나 학계 등 외부 집단으로부터 은폐되어있던 정체성이 드러날 때 이뤄진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성이 차별 언어의 혐오적 특성을 묵인하고 통상적인 사용을 가능케 할 수 있을까?
 
 장애인은 선척적 혹은 후천적으로 신체나 정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하여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장애인은 비하하기 위한 목적이 없고 공적으로도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을 가리켜 장애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받아들인다. 하물며 "이태원 클럽에 장애인이 많다."라고 말한다면, 불편함을 느낌과 함께 발화자의 의도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장애인은 비하적인 표현으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어 불편함이 더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소득층이나 빈곤층으로 생각해보자. 사람을 가리켜 저소득층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분명한 무례함이다. "이태원 클럽에 빈곤층이 많다." 역시 차별적으로 들릴 소지가 있다. 사회적 용어라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되기란 힘들어 보인다.
 
 흑인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회적 용어라도 일상에서 무리 없이 사용되기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구별 지어 일반적인 존재와 이질적인 존재로 나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흑인을 사회적 용어에 한정해 가두는 것은 어떨까? 사회적 용어는 학문과 정치, 도덕으로부터 정당성을 얻는다. 그렇다면 사회적 용어를 학문, 정치, 도덕에서만 그 사용이 정당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당연히 터무니없는 소리다. 일상에서도 사회적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시각장애인이 길을 잃어서 도와주느라 늦었어."와 같이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오는 길에 흑인이 길을 잃어서 도와주느라 늦었어."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시각장애인은 발화자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말이지만, 흑인은 굳이 특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누가'라든지, '외국인' 이라든지 불특정 한 사람을 나타낼 말은 얼마든지 있다.(사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외국인이라고 예단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뉴스를 보니, 흑인 혐오가 생각보다 심각하더라."와 같이 일상에서 사회적 용어를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드러낼 수 있다. 이때는 '흑인'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인 속성은 덜해지고 사회적 용어의 특성이 부각된다. 따라서,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를 공간적으로 구분 지어 사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애초에 언어를 표백하진 못한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고, 세계는 불편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악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차별 언어는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담론은 가까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비가 내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하지만, 인간은 집을 지어 비를 피하고 외출할 땐 우산을 쓴다. 차별 언어를 지양하는 것은 소수자들에게 집은 지어주지 못해도, 우산을 함께 쓰는 정도의 노력은 될 수 있다.
 
 여태껏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 사이의 쓰임이 모호함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모호한 까닭은 소수자들을 차별의 대상이라는 하나의 집단에 묶어 놓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오는 길에 시각장애인이 길을 잃어서 도와주느라 늦었어."와 "오는 길에 흑인이 길을 잃어서 도와주느라 늦었어."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두 존재는 각각 다른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 시각장애인은 신체적 장애, 흑인은 피부색이다. 같지 않은 대상을 대충 묶어 사회적 용어인지 차별 언어인지 따져보고 있었던 것 자체가 문제였다. 시각장애인과 흑인은 각각 다른 기준에서 그 쓰임이 차별적인지 아닌지를 물어야 했다.
 학생회의 답변으로부터 떠올랐던 물음을 상기하면 '흑인은 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동시에 인권위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흑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두 측면, 즉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에 주목했고, 그 쓰임이 어떻게 나뉘는지 알기 위해 같은 범주 아래에 있는 다른 단어, 그러니까 '장애인'과 '빈곤층' 등의 사용을 비교했다. 여기서 오류를 범했다. 같은 범주 아래 있더라도, 각 요소는 다른 속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따라서, 단어의 쓰임이 차별 언어인지 사회적 용어인지는 '흑인', '장애인', '빈곤층' 등마다 다르게 판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물음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물음은 정확히 '흑인'이라는 단어 하나에 한정하여 따져보아야 한다. 흑인에 담긴 차별적인 의미와 사회적 의미 사이의 모순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제 마련해야 할 것은 둘 사이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기준은 이미 언급되었다. 앞서 학생회의 해명을 지적하면서, 단어 사용의 정당화는 얼마나 사용하는지가 아니라,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그것이 풍기는 뉘앙스,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다. '흑인'은 분명 인권위에서 사용될 만큼 국가차원에서 그 쓰임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에서 사용될 때는 그 정당성을 주변 맥락에 비추어 다시 획득되어야 한다. 즉,  '흑인'이 언급되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차별 언어인지 사회적 용어인지 판단해야 한다.
 따라서,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에 걸친 단어들은 제각각 다른 기준들로 판단되어야 한다. 맥락과 뉘앙스, 반응 등의 종합적인 판단으로 말이다. 이것을 모두 나열하긴 불가능하다. 한 사람이 모든 차별 언어에 엄격한 기준을 갖는 것도 어렵다. 보편적인 판단 기준이 있으면 단순했겠지만(앞서 범한 오류 역시 단순한 기준을 찾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번거롭게 하나 씩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집을 짓는 만큼 거창한 공사가 아니라 짧은 우산을 준비하면 좋을지, 긴 우산을 준비하면 좋을지, 하물며 어떤 색깔의 우산이 좋을지 정도로 생각하면 한결 나을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 이웃들의 반응이나 개성을 암묵적으로 계산하면서 어울려 지내기 때문이다.
 
 그까짓 단어 선택 하나에 누가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나 싶을 수 있다. 차별 언어든지 사회적 용어든지, 사실 사람들은 따져 생각하지 않고 말한다. 그러나 듣는 이는 다르다. 언어는 말할 때 보다 들을 때 더 무겁게 다가온다. 말하는 이에게 듣는 무게를 조금이라도 느끼게 한다면, 조심할 사람은 많아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의 마무리로 제시한 종합적 판단, 그러니까 차별 언어와 사회적 용어의 구분을 맥락과 뉘앙스, 반응 등의 판단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의문일 수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통하는 것 같다. 다 지난 행사에 잘못을 지적했음에도, 이를 시인하고 발전을 약속한 학생회의 반응이 뒷받침한다. 애초에 답을 찾기 위해 글을 시작했지만, 답은 글을 쓰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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