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주현 Jan 01. 2022

운세는 기사가 아니다

 아침마다 속보가 뜬다. 말이 속보지 우리 언론사 알람이다. 역술인에게 의뢰해 작성한 운세가 알람을 타고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이따위 것을 누가 본다고 아침마다 쏘는 것일까. 온라인 상에 낭비되는 전력과 데이터가 아깝다. 게다가 우리는 언론사다. 운세는 기사가 아니다. 기사의 형식을 갖춰 독자에게 전달되는 꼴이 언론인으로서 양심에 찔렸다.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부서 사람들과 커피를 마셨다. 뻔한 대화가 오고가는 틈에 운세 얘기가 나왔다. 그런걸 누가보는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동기나 선배는 앞다투어 즐겨본다고 답했다. 생각보다 운세 기사가 우리 작품 중 호응이 괜찮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야기는 타로와 사주, 무속과 종교로 이어지면서 운세 이야기는 어느사이 떠다니는 음절들 속으로 금세 묻혔다.


 종이 신문에도 구석 한 켠에 둥지를 튼 운세·사주 정보를 자주 볼 수 있다. 심지어 정치인·연예인 같은 셀럽들의 팔자를 역술인이 해석한 기사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당연해 보이는 이 현상, 과연 언론과 운세가 양립 가능한 범주일까?


 언론과 운세는 문법이 다르다. 언론이 다루는 소재는 사실관계 확인이 가능해야한다. 사실관계는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하고 개연성이 있으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관점에 따라 해석은 달리할 수 있어도 공통적으로 다루는 인물, 사건, 배경은 합의가 가능하다.

 반면 운세는 주술의 영역이다. 고대서부터 이어온 관습 혹은 샤머니즘, 즉 믿음의 영역이다. 요즘은 빅데이터니 뭐니 사주와 결합해 정제된 방식으로 정보를 유통하지만, 검증이 불가능하고 성긴 개연성을 가질 뿐이며 합의 가능한 사실보단 “~하는 것이 좋다”는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다루고 있다. 즉, 언론이 다룰 영역은 아니다.


 운세 보도가 이해하지 못할 것만은 아니다. 언론의 기원이 사람의 이목을 끄는 광고에서 출발하였다는 설도 있고 조회수로 장사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정보라면 쉽게 마다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구색을 갖춘 언론이라면, 단어 하나의 뉘앙스까지 체크하면서 문자와 사실을 맞물리게하려는 노력을 하는 곳이라면 운세는 지양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해가 된다고해서 해야할 것하지 말아야할 것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언론은 객관적인 사실 전달로 왜곡되지 않은 사회 모습을 반영할 의무가 있다. 언론은 여태 그런 식으로 신뢰를 쌓아올렸고 언론의 영향력도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전달의 힘에 기대어 주술을 끼워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의 불신을 초래할 뿐이다. 기사 말미에 ‘본문은 본사의 의견과 같지 않다.'라고 적는다 해서 책임회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천공스님과 윤석열의 관계가 이슈화되고, 윤석열 손에 王자가 적혀 있다는 것으로 논란을 일으켜 조회수 꽤나 짭짤하게 뽑았던 언론들은 본인들의 지면에서 운세가 놀아나는 꼴은 잘도 눈을 감아준다. 그러니 윤석열이 광주를 방문한 뒤 무지개가 폈다는 단순한 사실들의 집합을 가치를 지닌 사건인 마냥 기사로 보도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에휴 참.

작가의 이전글 저렙 기자는 화가 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