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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팔남매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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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모래시계 Oct 21. 2023

66년생 다섯째, 지숙

지숙은 팔 남매 중에 가장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 날씬하게 키도 커서 미용실 원장님이 내미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참가신청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엄마에게 머리채를 잡힐뻔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난리가 한 판 더 났을 것이다.


아버지는 지숙을 오망이라고 불렀다. 오망이는 하는 모든 일이 시원찮았다. 더구나 왼손잡이라 밥 먹을 때마다 타박이었다. 언니들이나 동생들이 하기 싫어하는 심부름은 전부 지숙 차지였다. 그러나 생김새만큼이나 마음씨도 곱고 깊은 지숙은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라는 대로 했다. 아버지가 지숙을 나무라는 날이 많아졌다. 


지숙은 국민학교를 다닐 때 공부도 곧잘 했지만 한 번도 아버지와 엄마는 오망이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넘어지지 않고 집에 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숙 팔과 다리에는 멍이 없는 날이 없었다. 그래도 지숙은 해가 갈수록 이뻐지고 날씬해졌다. 지숙을 짝사랑하는 동네 오빠들의 쪽지 심부름을 하며 지숙의 동생들은 과자를 얻어먹기도 했다.


아래채 굴뚝이 막혀 아버지는 동네 김 씨를 불러 아궁이를 부수고 다시 만들었다. 엄마는 영숙이 둘째를 낳아 몸조리를 해주러 마산에 내려가고 없었다. 아버지는 김 씨 점심을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다. 사정을 말하고 그냥 있는 밥에 소박한 반찬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가 다 되었을 때 갑자기 중학교 2학년인 지숙이 쭈뼛쭈뼛 나와 점심을 다 차렸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제 15살인 오망이 지숙이 차려봤자 오죽할까 싶으면서도 아버지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구들이 먹는 네모난 나무상 위에 음식들이 도란도란 올라앉아 있다. 구색은 다 갖추었다. 밥과 국, 나물무침과 계란말이, 상추와 고추와 쌈장, 고등어구이까지. 아버지는 가만히 숨을 내쉬고는 오망이 지숙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우리 오망이가 이제 이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 밥상을 들고 들마루로 나오자 일을 하던 김 씨도 감탄을 해대며 맛있게 먹었다. 밥은 꼬슬꼬슬 아주 잘 되었고, 시금치 된장국도 시원하고, 계란말이는 간이 너무 잘 맞아 입 안에서 살살 녹고, 막장은 또 얼마나 고소했는지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오면 꼭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둘째 희숙이 아버지를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잠시 차도가 있던 아버지는 다시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다. 의사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의식 없는 아버지를 태운 엠블런스가 성그렛골로 들어서자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차 뒤를 따라왔다. 엄마와 시집간 딸들과 아직 어린 자식들, 마당에 서 있는 동네 사람들을 남겨두고 아버지는 안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숙은 초상을 치르는 동안 문상온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동네 아낙들과 함께 만들었다. 그때 지숙 나이 18살이었다. 


18살 지숙은 대도시로 이사 나온 엄마와 두 동생을 돌보느라 하고픈 것을 하나도 못했다. 야간 고등학교도 가지 못했고 지숙을 좋아한다며 쫓아다니는 오빠들 중 맘이 가는 오빠에게 고백도 하지 못했다. 식당에 다니는 엄마와 함께 생활비를 벌며 동생들 공부를 시키느라 지숙의 아리따운 시절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지숙은 도시 근교 면장집 둘째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미용실 원장이 중매를 섰다. 면장집은 말 그대로 땅부자였다. 엄마는 이제 지숙 걱정은 덜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째 사위는 장모와 처제 처남도 잘 챙겨서 처형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지숙의 딸과 아들이 차례로 태어났다.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지숙의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다. 폐업과 창업을 여러 번, 지숙의 남편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땅은 지천이라 부지런만 하면 밥 굶을 일은 없었다. 시부모님과 맏형님네가 사는 시댁 행랑채에 단칸방 살이를 하면서도 지숙은 아이들을 부족함 없이 키웠다. 시부모님 봉양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지숙의 시아버지는 돌아가시며 알토란 같은 과수원을 가진 것 하나 없던 둘째 아들에게 남겼다. 


지숙은 과수원에 작은 농막을 지어달라고 남편에게 애원했다. 솜씨 좋은 지숙의 남편은 탄탄하게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과수원 입구는 지숙의 취향대로 꽃나무를 잔뜩 심었다. 비닐하우스 끝자락에 지붕을 넓게 내어 나무 벤치와 탁자도 들여놓았다. 손이 크고 음식 솜씨가 좋은 지숙은 비 오는 날이면 엄마와 언니들과 동생들을 오게 해 농사지은 풋고추에 상추 겉절이를 곁들인 쫄깃한 칼국수와 고소한 부침개를 나눠 먹었다. 추석을 앞두면 엄마와 팔 남매는 생활한복을 차려입고 지숙네 비닐하우스에 모인다. 방앗간에서 반죽해 온 쌀가루와 산에서 주운 밤을 쪄서 만든 소를 넣어 송편을 만든다. 지숙은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을 지펴 솔잎과 함께 송편을 쪄낸다. 옛날이야기를 펼치면 웃음도 같이 일어난다. 했던 이야기, 들었던 이야기들이 송편과 함께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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