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로 보내는 짧은 글을 읽는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 있다. 영화 <In Between Days (방황의 날들)>의 주인공 에이미Amy의 목소리이다. 수신자와 발신자가 분명함에도 그 편지 사연의 궁금증 때문인지, 목소리의 배경이 되는 장면 때문인지 관객의 시선과 청각적 집중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머문다.
2007년의 캐나다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인 십대의 일상은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연결되었으나 또 그러한 이유로 외로운, 또 그러한 채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다소 아날로그적인 작품이다.
부재하는 아빠에게 쓰는 편지
부재하는 아빠에게 쓰는 편지는 새삼스럽게 슬플 것도, 과장되게 기뻐할 것도 없지만, 그가 부재 중인 이상 "나, 에이미"는 편지를 쓴다. 혹은 그의 휴대전화에 남기는 음성녹음으로 저장된다. 영화에서도 나는 아빠에 대한 마음과 아빠를 향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부모의 불화가 나를 덮치지만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니까.
‘언젠가는’이라는 가정법
언젠가 오겠다고 했고 분명히 오려고 했는데 틀어진 계획과 약속이 못내 아쉬운 “나” 에이미는 또 당신, 아빠에게 당부한다. “....근데 나중에는 꼭 와야 돼, 약속은 약속이니까.”
정지된 화면, 사진 속의 풍경은 잠과 잠들지 못한 세상의 경계를 비춘다. 그곳은 어둑하게 해가 지거나 희미하게 밝아온다. 인적은 없고 어쩐지 좀 많이 추울 것 같은 그 스틸사진 속의 도시는 감은 눈 속에서 그려지는 주변의 모습이거나 어제저녁 무렵에 걸어온 풍경이거나 또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보게 될 일상의 또 한 조각이다. 내가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이곳을 당신은 모른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다만 한 통의 전화로 연결된 ‘아빠’라는 당신에게 내가 속한 세계는 그토록 낯설다. 나는 매일 아침 당신에게 나의 이야기를 쓴다.
좋아하는 마음 들키지 않기
'나'는 ‘트란’과 함께 실내 주차장에서 문을 잠그지 않고 주차된 자동차를 돌며 물건을 훔치며 시간을 보낸다. 트란은 카오디오를 뜯고 나는 조수석 글로브박스에 방치된 현금이나 값나가는 물건 따위를 점퍼 안쪽에 숨겨나온다. 우리는 이러한 비행을 감행할 만큼 가깝지만 더 가까워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것에 서툴다. 이유 없이 좋고, 이유 없이 싫고, 하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고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전화를 건다. 네가 다른 사람을 보고 웃는 게 불편하고 네가 다른 사람의 파티에 놀러가는 것도 못마땅하지만 우리는 그냥 친구일 뿐이다.
나의 잘못이 아닐 것
“나”는 잘못이 없지만, 또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잘못일 수 있으므로 나는 다시 그들의 “축하 카드”를 굳이 돌려주러 간다. 내가 훔친 것이 단순히 카드만이 아니라 그들의 단란함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내가 잠시 내 서랍 안쪽에 비밀로 숨겨두었던 누군가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들의 행복이 휘발되지 않도록 나는 내 비행非行을 거슬러 다시 실내 주차장으로 향한다.
혼자 혹은 둘이 그리고 여전히 외로운
“나는 네가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친한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그냥 친구라고 (혹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라고) 결정을 내린 후, 나는 너에게 속하지 못하고, 너 역시 이제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누군가가 된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서툴고 수줍은 십대는 함께 방황하고 춥고 습한 겨울을 보내고 기찻길 육교를 거닐며 끝이 없이 이어진 송전탑 끝에 어쩌면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낙서로 공책을 채우며 졸리지만 뜬 눈으로 찬 바람을 맞으며 어제 걸었던 같은 길을 걷는다.
새 아빠가 아빠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고, 엄마는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믿는 것으로 안도하고, 나는 서툰 영어로라도 말을 하고, 깊은 밤 쇼파 위에서 흐느끼는 엄마를 목격하며 집과 학교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나는 자라고 있다.
p.s.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그리고 보고 나서 관객으로서의 내 마음에 흘러간 글귀를 적어보면 에이미의 마음은 이미 명료하다.
매일 아빠를 생각해. 매일 이곳에 없는 아빠를 생각해. 매일 이곳에 없어서 내 곁에 없는 아빠를 생각해. 매일 이곳에 없어서 내 곁에 없어서 커가는 나를 보지 못하는 아빠를 생각해. 아빠가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