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살이의 복잡 단순한 한계
나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에 속하기는 한다.
발음이나 억양 흉내를 잘 내는 탓인지, 아는 단어의 개수가 초라하게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제법 듣는다. 호주에서 알게 된 한 친구는, 40년 이상 호주에서 살고 있는 자기 엄마보다 낫다고 우스갯소리도 한다. 참고로, 그 친구는 호주에서 태어났고 아빠는 한국인, 엄마는 일본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영어권 사람 치고는'이라는 전제 하에서 하는 말임을 알고 있다.
진지하게 대화가 깊어지면 내 머릿속은 이제 단어를 찾느라 분주해진다.
앞에서 정성껏 차려놓은 멋진 억양과 발음이 만들어준 이미지가 내 특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천천히 깔아 뭉개지는 타이밍이다.
비슷한 단어가 여러 개 생각날 경우, 어떤 게 더 그 상황에 적합한 단어인지 머리를 굴리느라 내 발화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말 수가 별로 없는 나는 더욱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젠장)
나는 어느덧 그 무엇보다 책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아니고...)
그 본질을 따라가 보면, 사실 나는 언어 자체에서 매력을 느낀다.
내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고 공감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그 대화에서 내 생각을 극도로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딱 골라내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나에게는 어떤 종류의 쾌감보다 두고두고 지속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이다.
모국어인 한국어로도 그런 단어를 찾으며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영어는 내 모국어도 아니고 단어 공부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그런 상황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외국에서 살면서 주변에 이런저런 얕은 이야기들은 영어로 주고받지만
마음속 깊은 대화를 할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도 어렵고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에서도 더 조심스러워지는 걸 보면,
나이 든다는 건 소심해지는 일이다.
그래도 이왕 여기서 살기로 한 거, 바보가 되기는 싫으니 영어 공부를 하자고 매번 다짐한다.
20대 때 공부했던 영어뉴스 받아쓰기도 해보고, 유튜브로 좋은 강연을 들어보기도 하고,
몰랐던 단어들은 기록해 두었다가 암기할 수 있도록 메모도 해본다.
얼마 전에 읽었던 Kent Haruf의 소설 <Our Souls At Night>에서는 이런 설정이 나온다.
어느 날 주인공인 70대 할머니가 같은 동네에 사는 젊잖은 70대 할아버지의 집에 찾아간다.
둘 다 남편과 아내를 잃은 지 오래이고, 자식들은 모두 독립했기 때문에 혼자 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다짜고짜 제안을 한다. 자기가 밤에 혼자 자기가 외로워서 그러는데, 당신이 괜찮은 사람 같으니 밤에만 자기 집에 와서 같이 이야기하다 잠만 자고 가줄 수 있겠느냐고.
혼자서 빵 터졌다. 이 할머니 귀여우시네..
평범한 할머니 입에서 나온 것 치고는 정말 기발한 제안이다. 평생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는 않다나. 할아버지는 고민하다가 그렇게 해보기로 결심하고, 저녁을 가볍게 먹고 샤워를 한 후 파자마를 챙겨 할머니 집으로 걸어간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난 이유는?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누군가와 함께 인생 이야기라도 하려면 최소한 언어의 문제는 없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깊은 대화가 그리운 요즘, 언어의 문제는 곧 마음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느낌이다.
슬며시.. 언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극복해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