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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 Dec 15. 2021

43살 작가는 구직 활동 중

한 달 동안 네 곳에 이력서를 냈다.

오전 8시까지 출근해야 하지만, 오후 2시 30분이면 칼퇴가 가능하다는 뉴스 프로그램과 60분짜리 건강 다큐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에 보낸 이력서에서는 연락이 없었고, 파일럿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를 구한다는 공고에는 공교롭게도 내가 이력서를 내자마자 더 낮은 연차의 작가를 구한다는 수정 공지가 올라왔다.

교육 영상 작가를 구한다는 한 기업의 모집 공고는 보자마자 이력서를 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음 날 바로 글이 삭제됐다.

마지막으로 메인 작가가 아이템 서치부터 섭외, 원고, 자막까지 쓴다는 경제 뉴스 프로그램은 몇 번의 고민 끝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 이력서를 넣자마자 '진짜 업무 최강이네요. 자료조사, 섭외, 대본, 자막까지', '여기, 극한입니다', 라는 댓글이 달렸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기에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경제 뉴스 역시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메인 작가를 구한다는 공지가 이번 주 내내, 이틀에 한 번 꼴로 올라왔다는 사실이다. 채널이 많아지면서 내용의 깊이보다 재미와 흥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적당한 페이를 받는 적당한 연차의 작가가 맡아도 무리 없는 프로그램들이었다. 굳이 돈 많이 드는 연차 많은 작가를 쓸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메인 작가 모집 공고는 가뭄에 나는 콩보다 더 보기 어려웠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력서를 내고 연락을 기다리다 결국 실망하는 횟수가 늘었다. 직전에 어떤 프로그램을 했든 끝나고 나면 다시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구직자 신분이 됐. 그렇다 보니 내가 이토록 형편없는 작가였나, 그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쌓이는 연차만큼 자존감이 떨어졌다. 게다가 점점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과 적응하는 것도 어렵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이 펄펄 끓는 물속에 굳이 손을 넣어봐야 아나, 하는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나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계속 한 자리에 머물게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도 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두 눈 질끈 감고 손을 담갔던 프로그램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모르고 담갔을 때보다 더 큰 화상을 입고 나만의 동굴로 숨어들어야 했다.


얼마 전 읽은 제7회 매일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분 당선작,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생각난다. 황혼 이혼 후, 62세부터 65세까지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순자 할머니 자신의 경험담을 쓴 글인데 구직 시장에서 노년 여성이 얼마나 초라한 대우를 받는지, 필체는 담담했지만,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황혼 이혼 후 하고 싶었던 문학 공부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고 미술, 문학, 음악, 상담 치료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20년 넘는 호스피스 경력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화려한 이력은 구직 시장에서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이력서에 '중졸'이라는 한 줄만 남기고 모두 지워버린다. 그제야 구직 담당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청춘 다음은 바로 노년이 아니다. 사이에 중년이라는 나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종 이 사실을 잊는 것 같다. 중년 세대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같다.


쌓이는 연차,

늘어나는 나이,

그만큼 줄어드는 기회.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노년을 기다릴 수는 없다. 가만히 앉아 있든, 서 있든, 누워 있든. 천사의 고지를 받은 사람을 찾아오는 지옥의 사자들처럼 노년은 피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이력서를 돌리고, 닫혀 있는 모든 문을 두드리고, 방송작가 전용 구직 사이트를 수시로 드나들며 새로고침 하고, 말도 되는 프로그램에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넣는다. 이력서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다니며 어떤 말을 낳을지 없지만, 열심히 넣는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겠지. 같은 지옥도 다르게 느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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