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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 Dec 21. 2021

대기업의 맛

아홉 살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아유, 월요병 돋아, 아무 데도 가기 싫어', 를 연발했다.


"너 월요병이 뭔지 알아?"

"주말 지나고 다음 날 학교 가기 싫은 거." 

"그럼 월요병 없애는 방법도 알아?"

"......"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는 거야." 


아이는 그럼 일주일 내내 학교에 가야 하는 거냐며 그런 일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다고 진저리를 쳤다.


아이의 월요일과 나의 월요일은 다르다.

나의 월요일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무언가 흥미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 가득한 날이다. 주말 동안 휴식을 취하던 구인/구직 사이트의 컨베이어 벨트가 다시 작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방송작가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방법은 보통 세 가지다. 내부에서 자리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지원하는 방식과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운영하는 2곳의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공고를 통하는 것이다. 물론, 막내 작가나 10년 차 내외의 서브 작가를 구한다는 글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메인 작가를 구한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오늘은 또 어떤 곳에서 어떤 작가를 구한다는 글이 올라올까?


요즘은 방송 프로그램도 많고 유튜브 채널도 많아져 다양한 분야에서 작가를 구한다. 기업에서 교육 영상을 만들 작가를 구하는 공고도 그중 하나다.


나도 지난여름, 한 대기업에서 외주 받은 회사가 올린 글을 보고 이력서를 낸 적이 있다. MZ 세대인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다큐 영상을 제작할 작가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다행히 이력서를 내자마자 바로 연락이 왔다. 담당자는 자신들이 받은 이력서 중, 나를 포함해 두 명의 작가가 유력한 후보인데 면접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어제 나보다 먼저 면접을 본 작가가 지금 일하려는 기업과 일해본 경험이 있어 그 작가와 계약하기로 했다며 연락이 왔다.

방송국에서도 작가를 뽑을 때, 기왕이면 비슷한 프로그램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한다. 기업도 기업 일을 해 본 작가가 그쪽 생리를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면접을 보기로 해 놓고. 보지도 않고 떨어뜨리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기분 나쁨을 계속 유지했어야 했다.
쓸데없는 미련과 호기심이 일을 그르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


며칠 후, 외주 제작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함께 일하기로 한 작가와 클라이언트 회의까지 했지만, 더는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와 다시 면접을 보고 싶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클라이언트 회의까지 했던 작가를 잘랐다는 말은 너무나 이상했다. 그 기업의 일을 한 번도 안 해 본 작가도 아니고 분명, 적은 연차도 아니었을 텐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상황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했던 나다. 어떻게든 대기업 쪽 일을 뚫고 싶은 마음에 현상 뒤에 숨겨진 본질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강남에 사무실이 있는 외주 제작사는 의외로 다큐 제작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광고 회사였다. 다큐가 어떤 시스템으로 제작되는지도 잘 몰랐다. 그건 클라이언트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방송 쪽으로 문외한이다 보니 회의를 할 때마다 내용이 바뀌고 의견이 절충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이언트는 우리의 돈줄이었다. 감독은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 기획안을 수정하겠다고 했다.


처음 계약할 때 약속했던 기획안 작업의 횟수가 무제한으로 늘어났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대기업 중 한 곳이다 보니 위기와 성장을 거듭해 온 역사가 방대해도 너무 방대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방송작가가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얕게 습득하는 전문가라고 해도 기획안을 정리하기 위해 모든 내용을 숙지하기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번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신입사원보다 더 많은 양의 지식을 습득했다. 나중에는 직원도 아닌데 애사심이 일 정도였다. 덕분에 배운 것도 많았다. 기업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경제의 역사였다. 평소 경제나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 대한민국 정치, 경제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냥 늘어나는 스케줄과 과한 일 양이 못 견딜 만큼 버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전 인터뷰를 진행한 조직의 임원이 나중에 사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나를 기억조차 못 하겠지만, 사장 임명 기사를 보고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뿌듯하고 반가웠다.


그러나 이건 모두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이야기다. 

나는 결국, 이전에 잘린 작가와 마찬가지로 일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기존 계약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일정이 늘어졌다. 일도 많아졌다. 그제야 나는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았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작가를 보호하는 문항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왜 나는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이대로 일을 그만두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갈 수도 없었다. 나는 담당 피디에게 추가 계약 사항을 제시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지금도 자다가 이불 킥을 하게 하고 새로 사장이 된, 사전 인터뷰를 진행했던 사람의 이메일 주소를 어떻게든 알아내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작가님이 뭐 한 게 있다고 그런 말을 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더는 저희랑 같이 못 갈 거 같네요."


프리랜서에게 주변의 평가는 곧 그 사람의 존재와 직결된다. 특히 약간의 완벽주의가 있고 자존감이 낮은 나에게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라는 말은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뭐라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애초에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사인했더라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십 년 동안 이어온 기업의 역사를 단시간에 습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재빨리 인정하고 적당히 했더라면.

한 번 작가를 자른 사람이 두 번은 못할까라는 생각을 미리 했더라면.


그래도 다행인 건(이럴 때만 나오는 긍정 마인드) 계약금은 챙겼다는 사실이다. 받기로 한 돈의 10분의 3에 불과하지만 빈털터리로 쫓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런데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면서 요즘도 기업에서 교육 영상을 제작할 작가를 구한다는 글을 보면 이력서를 만지작 거린다. 연차가 맞지 않아 못 내는 것뿐이지 조건만 맞는다면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할 것이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그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대나무 숲에 대고 소리치는 사람처럼 글이나 쓰고 있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런 마인드를 바꾸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부디 내년에는, 마흔네 살에는 이전보다 조금은 성장한 나를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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