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작 Dec 29. 2021

30분에 만 오천 원, 신년 운세


요즘은 굳이 작가 일만 고집할 게 아니라 카페나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할 때가 많다. 100세 시대는 여러 직업이 필수이기도 하고 20년 동안 작가 일 했으면 오래 했지, 더 늦기 전에 다른 세상도 알아 둬야 나중에 허둥대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방송작가 협회의 구직 사이트 말고 잡코리아 같은 일자리 플랫폼을 살펴보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방송 쪽이 아니어도 작가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을 테니 일의 확장 측면에서 틈틈이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곳에 올라오는 자리는 대부분 정시에 출, 퇴근을 해야 하는 회사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배 부른 소리라고 하기 '딱'이겠지만), 20년 동안 프리랜서로 살다 보니 정시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생활은 잘 상상이 안 간다. 어느 정도냐 하면- 몇 년 전, 한 대기업에 경력직 작가로 입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파란 다리 위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아는 내부 직원의 강력한 소개로 면접을 보게 된 자리라 말만 적당히 하면 바로 출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 합격하면 직장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걱정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대기업 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꼴이 돼 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세상 물정 모르고 산다.


정시 출, 퇴근하는 곳이 아니면 굳이 20년 차 작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홍보 글을 올리거나 홈페이지 관리를 하는 일 같은. 가끔, 성형외과나 한의원 같은 곳에서 유튜브 방송용 대본을 집필할 작가를 구하기도 했지만, 이력서를 내도 답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며칠 전, 온라인으로 타로 상담을 받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내가 배운 타로 지식은 다른 사람들 봐주는 데 쓰고 정작 나는 다른 데 가서 돈 내고 본다. 작년에도 본 곳인데 후에 용하다는 점쟁이 소문을 듣고 어렵게 예약하고 찾아간 점집보다 훨씬 정확도가 높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되는 마음으로 상담을 요청했다.


프로그램 존폐에 따라 밥그릇이 왔다 갔다 하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방송작가들은 대부분 점이나 타로 같은 미신에 관심이 많다. 어떤 프로그램의 작가가 어디서 점을 보고 왔는데 그렇게 잘 맞힐 수가 없다더라, 하는 소문은 순식간에 각 방송사로 퍼졌고 거기가 어디든 갔다 왔다는 작가들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듣고 찾아간 점집이 몇 군데 된다. 하지만 어릴 때는 나름 이력 관리도 잘했고 삶의 굴곡도 그리 크지 않아 막상 가도 별로 물어볼 게 없었다. 신 내림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발이 아주 좋다는 어떤 점쟁이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웬만하면 이런 데 다니지 말라고. 뭔가 고민이 있거나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이 와야 나도 해줄 말이 있는데 '그 점쟁이가 용하다더라. 어디 얼마나 용한지 한 번 가서 볼까', 하고 찾아온 나 같은 사람한테는 딱히 해 줄 말이 없고 그러면 자기도 너무 힘들다고. 졸지에 점쟁이를 힘들게 하는 평범한 작가가 되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타로 상담사는 다행히 내년이 올해보다 더 좋을 거라고 했다. 멘털 관리만 잘하면 일도 잘 되고 다 좋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30분에 만 오천 원 하는 타로가 나의 내년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바로 이런 거였다. 지금은 힘들고 앞이 캄캄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넌 앞으로 잘 될 거야. 그러니까 힘내.

매거진의 이전글 대기업의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