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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 Jan 07. 2022

나도 올 해의 방송작가상 받고 싶다

올해 마흔 살이 돼 우울하다는 후배 작가를 만났다. (나는 마흔네 살이 되었다)

산에 다니는 걸 좋아하는 그녀는 얼마 전 등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즌1 방송이 끝나 지금은 잠시 쉬고 있었다.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지만(부럽다), 2월까지는 쉬고 싶어 2주에 한 번씩 대본 쓰기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마흔 살에 (자가) 20평짜리 아파트가 있고 큰 자동차도 있고 몇 달은 일 하지 않고 자기 계발만 해도 충분히 먹고살만한 여유 자금이 있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일할 여건이 되어 있는 그녀가 우울증이라니!


그녀는 우리 동네에 잠봉뵈르 맛 집이 있다며 거기서 만나자고 했다. (동네 주민인 나는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바질, 고수 같은 향이 강한 식재료를 좋아하는 편이라 시그니처 메뉴인 바질 잠봉뵈르가 내 입 맛에 딱이었다.

적당히 배가 부르자 그녀는 사람이 우울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흔 살을 앞두고 그녀는 소개팅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 사실이 더 놀라웠다) 상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그녀도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마흔 살을 앞두고 한 소개팅은 여러 모로 의미가 남달랐다. 지금까지는 일하는 게 좋고 돈 버는 게 재미있어 결혼을 안 한 것뿐이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몸과 마음이 건강한 그녀라 '우울해'에 가라앉기 직전 동네 뒷산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에 좋은 감정을 갖고 만나다 일이 바빠 흐지부지 됐던 사람에게 연락해 밥을 먹기로 했다. 우울해의 깊이는 다시 발목까지 얕아졌다. 


그녀를 만나면 나도 결혼이나 육아 말고 일을 선택했더라면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부러운 마음이 자주 다. 사실 나는 방송작가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 '있었다'가 아니라 '있다'로 쓰겠다.


매해 연말이면 각 방송사마다 시상식을 한다. 한 해 동안 본사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위해 애쓴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상을 주는 연예 대상 프로그램. 이때, 연예인뿐만 아니라 방송작가도 상을 받는다. 요즘은 방송 시간 상, 사전 녹화를 하고 아주 짧게 인서트처럼 처리해 버리고 말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에 나갔다.


방송작가를 시작할 때부터 상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아이를 낳은 해부터다. 12월 첫날 아이를 낳고 한 달 내내 아이와 모유수유와 부족한 잠과 싸우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우연히 연예 대상 시상식을 봤다. 전에는 어차피 방송국에서 다 짜고 주는 상, 뭐가 좋다고 눈물까지 흘리나, 저러니 연기자 하겠지, 하는 마음이 는데 그날은 달랐다. 산후 우울증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해 동안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 하고 지금의 결과를 얻은 그들이 너무나 멋있고 상을 받는 모습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도 저들 속에 함께 있고 싶다, 언젠가 꼭 저 무대에 올라 상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의 다짐과 목표는 지금 어디쯤 가 있을까. 방송작가 수명이 다 하기 전에(이미 끝났는지도 모르지만) 올 해의 방송작가 상 한 번 받아 볼 수 있을까.


아직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니 올 해는 방송작가 상에 도전해 보는 걸로 목표를 세워보면 어떨까.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지만 꿈은 꿀 때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법이니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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