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뜻한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고 했는데 벤티 사이즈의 카페라테 한 잔을 주문했을 때, 이미 수업 시간은 5분이 지나 있었다. 첫날은 오리엔테이션이라 괜찮겠지 했는데 벤티 사이즈 라테를 손에 들고 여유 있게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나 빼고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2월부터 바리스타 자격증 반 수업을 듣고 있다. 필기와 실기 시험을 모두 통과하면 2급 자격증이 나오는 과정이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5년, 혹은 10년 후를 생각하면 뭐라도 새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도 삶은 계속될 텐데 방송작가는 계속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지금도 간당간당한 수명).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의 연령대는 나의 5년, 10년 후를 연상시켰다.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엄청난 동안은 아니지만 대부분(아니 실은 거의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희끗희끗한 흰 머리카락을 염색으로 가리고 구부정해지기 시작한 등을 애써 꼿꼿하게 펴며 수업을 듣는 나의 동기들. 동기들 눈에 나도 그렇게 보였을까?
나이가 들수록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먹는 음식만 먹고 가는 길로만 다니게 되는 관성에 젖는다. 그런 타성을 거슬러 새로운 환경에 놓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려니 설렘과 동시에 엄청난 피곤함이 몰려왔다. 평소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커피를 공부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학생 모드로 앉아 있으려니 이론 수업을 들을 때 잠깐 정신줄을 놓기도 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을 배우는 어르신들이 한 박자씩 느리게 반응하는 걸 보고 답답해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은 역시 진리였다.
그냥 살던 대로 살 걸 그랬나, 나이 들어서 이게 무슨 생 고생이야,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론 수업이 끝나고 직접 에스프레소를 뽑아보는 시간이 되자 손바닥 뒤집듯 바로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감퇴하는 게 전두엽 기능이 약해져서라는데 이럴 땐 오히려 다행인 듯싶다.
평소 듣지 않던 말과 쓰지 않던 신체 기능을 사용하다 보니 3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일주일에 두 번, 하루 3시간씩. 이 경험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알 수 없지만 20년 방송작가 인생에 '커피 내리는'이라는 타이틀을 조심스럽게 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