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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27. 2024

행복한 가족

2023.11.11.토요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은 유독 일찍 일어나게 된다. 쿠바 여행지에 대해 검색도 하고 그동안 썼던 일기도 다시 읽어보면서 노닥거렸다. 느긋한 아침이다. 냉장고를 점검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식재료는 감자 세 개, 참치캔2개, 파프리카와 야채들이다. 미국 친구의 마요네즈를 좀 사용하기로 하고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감자를 삶고 있는 재료를 몽땅 썰어 넣고 섞었다. 여기에다가 얼마전에 샀던 부스러지는 빵까지 넣었다. 부스러지는 빵은 과자와 빵의 중간쯤 되는 것인데 간식으로 먹으려고 산 것이다. 그동안 너무 달달한 간식을 많이 먹어서 달지 않은 것을 먹고 싶어서 샀는데 너무 잘 부스러져서 먹기가 불편하다. 그래서 이참에 이것을 아예 부스러뜨려서 샐러드에 넣었다. 즉 빵조각을 품은 감자 샐러드다. 하하. 여기 와서 정체 불명의 음식을 많이 만들게 된다. 어쨌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모두 소진하는데 성공했다.

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 멕시코 친구도 나와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레시피 같은 것을 보면서 만들고 있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일주일치 요리 재료와 레시피를 배달해주는 웹 사이트를 알려준다. 재료들을 알맞은 용량대로 손질해서 배달해주고 거기 적힌 대로 요리만 하면 된단다. 일종의 밀키트다. 사이트에 들어가보니까 온갖 종류의 요리들이 있어서 선택의 폭이 다양한다.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 지금은 시기가 너무 애매하다. 여기서 떠날 날이 2주만 남았고 나에게는 이미 몇 가지 해둔 요리가 남았다. 그리고 이 웹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요리의 1인분은 나에게는 거의 2끼 분량이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요리를 하고 설겆이까지 마치고 나서 집을 나섰다. 오늘은 다운타운의 선물가게들을 다니면서 한국에 가져갈 선물들의 가격들을 비교해볼 것이다. 메이플 시럽이나 메이플 사탕과 같은 먹거리, 각종 모양의 냉장고 자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전 같으면 신기해보이는 것들을 이것저것 샀겠지만 이제는 그게 다 쓰레기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표적인 먹거리를 사는게 가장 낫다. 캐나다는 메이플 시럽이 유명하므로 선물용으로 적당할 것이다. 냉장고 자석은 사실 아주 유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캐나다에 왔다는 기념으로 몇 개 예쁜 녀석으로 고를까 한다. 

선물가게를 몇 군데 돌면서 가격을 사진으로 찍어서 비교해 보았다. 역시 유명한 쇼핑 거리는 다소 비싸다. 하지만 거기서 두 블럭 정도 떨어진 곳의 선물가게는 같은 제품이라도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 오늘은 선물을 사지 않고 시장 조사만 했다. 다음 주에 한두차례 쇼핑 타임을 가질 것이다. 귀국 선물을 고른다는 것은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 그리운 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동시에 정든 이곳을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양가적 감정이 수시로 교차한다.



시장조사를 마치고 밋업 한영 언어교환 모임에 갔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도 벌써 사람들로 꽉 차있다. 오늘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왔다. 익숙한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친구들은 다가올 스키 시즌을 기대하고 있다. 나에게 스키를 탈 줄 아냐고 묻는다. 나의 대답은 내 팔과 다리는 오직 걷는 용도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나는 운동신경이라고는 단 1도 없다. 예전에 스키 강습을 두 시간 받아봤는데 함께 간 친구들은 모두 탈 수 있었는데 나만 일어서는데 실패했다. 결국 포기했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1년이나 수영 강습을 받았으나 나는 여전히 물에 뜨지 못한다. 공으로 하는 운동은 더욱 못한다. 공은 항상 나를 때리기만 한다. 그냥 내 신체는 걷는 것만 잘한다. 그래도 나는 나의 신체에 만족한다. 잘 걸을 수 있어서 하이킹을 갈 수 있다. 

음식 이야기도 나왔는데 여기의 물가가 워낙 비싸니까 대부분 요리를 만들어 먹는단다. 다들 주로 무엇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한 샌드위치, 볶음밥, 야채볶음, 빵과 계란, 구운 고기 등 다양하다. 그 와중에 김치찌게 이야기가 나오니까 다들 신나서 김치찌게가 제일 맛있다고 난리다. 외국 친구들이 더 김치찌게에 열광한다. 그러고 보니까 나에게는 아직 김치가 남아있다. 저번에 한국 친구가 만들어준 김치다. 그래. 다음 주에는 김치찌게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대만 친구 J가 모임에 합류해서 열심히 떠들다가 함께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저녁 6시가 될 때까지 문법 복습을 했다. 요즘 진도를 나가고 있는 형용사절에 대해 이런저런 예문을 분석하면서 익혔다. 많은 예문을 보는 것이 이론만 보는 것보다 도움이 된다.


저녁 6시가 되자 미국 친구 M과 그녀의 엄마가 집에 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뭐했는지, 쇼핑에 대한 얘기, M이 그린 엄마의 초상화, 엄마의 취미인 뜨개질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M의 엄마는 우리의 영어 수준을 고려해서 아주 쉬운 말로 천천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덕분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M에게는 쌍둥이 남동생이 있단다. 아무래도 쌍둥이를 키우는 것은 힘들었을 것 같다. 대만 친구 J가 혹시 가끔 쌍둥이 아기들이 헛갈려서 한번 우유를 준 아기에게 또다시 우유를 준 적이 없는지 묻는다. 다소 엉뚱한 질문이지만 재밌는 질문이다. M의 엄마는 그런 적은 없지만 처음에는 둘의 구분이 좀 어려웠단다. 하지만 이들은 남자와 여자로 금방 구분이 되어서 둘이 헛갈리지는 않았단다. 그리고 M에게는 2살 터울의 여동생도 있단다. 쌍둥이를 키울 때와 여동생을 키울 때 많이 달랐을 것 같다고 했더니 정말 달랐단다. 

그런데 달랐다는 말의 의미가 내가 생각한 의미가 아니다. M의 여동생은 애초에 남자 아이로 태어났는데 성장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자로 결정해서 지금은 여자 아이가 되었단다. 아, 놀라운 얘기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M의 엄마는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쌍둥이 남매도 특별하고 성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한 아이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공감했다. 아이들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는 성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아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이러한 아이들을 각각의 존재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엄마가 더 대단한 것 같다. 정말 특별하고 행복한 가족이다. 나는 이 가족의 행복은 서로 존중해주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유쾌한 모녀와 함께 한 즐거운 대화였다. 이 모녀는 살짝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수시로 서로 사랑한다고 애정표현도 하였다. 참으로 친근한 모녀관계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일어나면서 M의 엄마는 다시 한번 M을 잘 대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대만 친구와 나는 오히려 M이 우리에게 잘 해주어서 더 고맙다고 했다. 



오늘 M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어서 아주 좋은 대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 기숙사에 와서 멕시코 배우 K와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드는 생각은 이 특별한 미국 친구 M과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인 것 같다. 나는 역시 행운아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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