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걸 좋아해 짝꿍과 부모님이 그리스어로 대화하고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곤 한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이제 알아듣는 단어가 몇 가지 된다.
제일 먼저 배운 그리스어는 바로 '네'다. 한국어로도 '네', 그리스어로도 '네'. 'Yes'란 단어가 발음도, 억양도 한국어와 똑같은 게 신기해 어원까지 찾아봤지만 역사적인 연관성은 없고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아니요'는 '오히'다.
그다음으로 배운 단어는 '레시'다. '쓰레기 같은 자식'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거의 두세 시간에 한번 꼴로 짝꿍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불같이 화를 내시며 소리를 지르시는데, 그럴 때마다 레시 레시 그러신다. '쇼비레(시끄러워 또는 닥쳐)', '부다나(창녀)' 또한 어머니로부터 배운 단어들이다. 체구도 작으시고 사랑 많으신 어머니가 유독 아버지에게 천둥 같은 소리로 소리를 지르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시는지 신기할 정도다.
이제 90세가 다돼 가시는 아버진 매일 그렇게 혼날만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신다. 토스터기에 생고기를 넣고 구우려고 하시다 어머니에게 그 모습을 들켜 혼나는가 하면, 어머니가 차에 타려고 한 발만 차 안에 들여놓은 상태에서 액셀을 밟아 큰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다. 매일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니셔서 짝꿍에게도, 어머니에게도 혼이 나는 만화 같은 캐릭터가 바로 아버지시다. 얼마나 자주 혼이 나시냐고? 난 오랫동안 그리스어로 '아빠'가 '아데레'인 줄 알았다. 짝꿍이 아버지에게 항상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봤더니 '아데레'는 '아 좀 빨리 오라고!!'라고 짜증 섞인 뉘앙스의 표현이란다. 가족에겐 이렇게 구박받는 아버지지만, 새끼 고양이 룰루이는 아버지를 제일 잘 따른다. 매일 밤엔 아버지 침대에 올라가 잠을 청하고, 아버지가 마당에 앉아 계시면 그 옆 의자에 올라가 누워있기도 한다. 우리 집 강아지 뿌뿌도 아버지가 식사하고 계시면 꼭 그 옆에 앉아 아버지만 뚫어지게 쳐다보곤 한다. 아버지 옆에 있으면 먹을 것이 나올걸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꼬리'로 불린다. 직역하면 '여자'인데,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꼬리'라고 부르는 짝꿍의 모습이 처음엔 생소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하고 불렀던 모습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짝꿍집에서 난 '어린 여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꼬루아'로 불린다.
내가 제일 자주 하는 그리스어는 '파히'가 아닐까 싶다. '먹는 것'이란 뜻이다. '파히'에서 '히'를 짧게 끊어주느냐, 살짝 길게 뽑아 주며 발음하느냐에 따라 '먹는 것'이란 명사가 되기도 하고 '먹다'란 뜻의 동사가 되기도 하는데 내 귀엔 파히나 파히이나 그게 그걸로 들린다. 배고플 때마다 짝꿍 앞에서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파히 파히' 하면 먹을 것을 챙겨준다.
장난기 많은 우리 짝꿍은 애처럼 단어 한 두 개만 가지고 그리스어로 소통하는 내 모습을 흉내네며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난 후 내게 '파히 파히 엑소 엑소'라고 하기도 한다. '파히'라고 할 때는 손가락으로 입을, '엑소'라고 할 때는 엉덩이를 가리키는 게 포인트다. 엑소는 Exit란 뜻이다. 파히 파히 엑소 엑소의 뜻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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