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곳에도 유토피아는 없었다

by 김지수


초원 위의 집은 꿈… 고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역이민자들


26-1.jpg

(사진/해외 한인거리 상가에서 역인민을 앞두고 귀국 선물을 장만하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준비된 이민만이 미래를 보장합니다.”


안아무개(39)씨는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는 식의 이민은 100% 실패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4년 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지난 2월 ‘역이민’을 온 경우다. “보통 사람들은 이민하면 푸른 초원 위의 집들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해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거죠. 하지만 실제 생활과 맞닥뜨리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이민자들은 대개 외국땅에 첫발을 내디딘 뒤 얼마 동안은 여행을 하면서 수려한 자연풍광에 취하기도 하고 낚시, 등산, 골프, 스키 등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런 여유있는 생활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돈도 못 벌고 성취감도 없었다


27-1.jpg

(사진/이민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캐나다 몬트리올은행. 낯선 금융환경도 현지 적응에 걸림돌이 된다)


“한 1년은 그냥 버티겠더라구요. 처음 비행기를 탈 때 그나마 여유있게 목돈을 챙겨간 터라 일을 안 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새 일거리를 찾아본답시고 빈둥빈둥 한해를 보내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져 버립디다.” 그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왜 다시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미리 모법답변을 준비해놓았다. 그런 탓인지 사연이 술술 흘러나왔다. “나중에 무력감을 달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게 되는데, 이게 문젭니다. 일감이라는 게 대부분 단순 잡일입니다.


사업이랍시고 한번 해보려고 나서니 피자나 야채가게, 도넛숍, 식당, 슈퍼마켓, 노래방, 세탁소 등이 고작입니다. 직업에 귀천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죽자고 일을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왜 여기에 왔나 하는 회의감에 빠져드는 거죠.” 배부르고 등만 따뜻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을 나와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 영업팀에서 근무했던 안씨는 별명이 ‘불도저’였다고 한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그의 일처리 스타일 덕분에 그에게는 항상 버거울 정도의 일감이 안겨졌다. 동료들이 일 중독증에 빠졌다고 놀려대도 그에게는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런 그가 이민 얘기를 불쑥 끄집어냈을 때는 부인도 처음 그저 일이 힘드니까 남편이 농담을 하는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였단다. 일 중독중에 걸린 사람이 갑자기 캐나다 같은 곳으로 이민을 가서 한가하게 그냥 지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안씨는 한때 현지 외국인 회사에 취직할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것도 조건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다들 유창한 영어실력에다,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변변한 한인회사가 많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고만고만한 오퍼상이나 여행사 등이 고작이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다시 귀국하는 길을 선택했다. 겨우 현지생활에 눈뜰 정도가 된 부인은 좀더 견뎌보자고 졸랐으나 결국 남편의 뜻을 따랐다. 안씨는 결혼을 늦게 한 덕분에 다섯살 난 아들 하나만 두고 있어 학교전학 문제 등은 신경을 안 써도 됐다. 그가 서울에 돌아온 지도 벌써 10개월. 그는 지금 친구와 함께 공동투자해 만든 조그마한 컴퓨터부품 판매회사를 꾸려나가고 있다. 저녁에는 야간대학원에 다니는 등 바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다시 이민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27-2.jpg

(사진/한국인이 경영하느 슈퍼마켓. 이민 가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일이 드물다는 것도 역이민을 결심하는 동기가 된다)


폐쇄적인 한인사회 분위기도 한몫


미국 워싱턴에서 7년간의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2년 전에 돌아온 최아무개(42)씨의 귀향소감도 안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씨는 워싱턴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여행사를 차려 한때 돈버는 재미를 만끽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왠지 모를 허전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도 결국 귀국을 선택했다. “먹고 사는 일은 걱정없게 됐는데 왠지 성취감이나 보람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한인생활이라는 게 뻔합니다. 일은 죽으라고 하면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그래봤자죠. 미국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소수민족으로 그 사회에서 크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뭔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서울에 다시 돌아왔다는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꼭 성공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최씨는 미국에서 틈틈이 배운 인터넷 실력으로 서울 서초동에 컨텐츠개발 전문회사를 차렸다. 처음 회사 문을 열었을 당시는 직원이 고작 3명이었으나 지금은 20여명으로 늘어났다. 최씨는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처럼 이민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해외생활의 무료함이나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이민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처음에는 낮선 현지 생활에 적응하느라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다가도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닥치다 보면 짧게는 1년, 길게는 4∼5년이 지나면 반드시 귀국의 충동을 느낀다고 이민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래서 실제로 이민자 열명 중에 한두명꼴로 되돌아온다고 이민공사 관계자들은 말한다. 물론 귀국을 선택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정부투자기관에 다니다 3년 전 미국으로 이민간 조아무개(38)씨는 인간관계 때문에 애를 먹었다. 물론 이 문제가 귀국을 결심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가정 불화가 깊어져 더이상 타국 땅에서는 살 수 없어 고국행을 택했다는 조씨는 그래도 한마디 던지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의식이 강한지 모르겠어요. 일단 이민을 왔으면 현지인들과의 동화에 애를 써야 하는데 그저 한국사람끼리 노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아니에요. 각자 혈연과 지연, 종교 등을 중심으로 패거리 모임을 만드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는 일도 잦지요. 유난히 자민족 중심주의 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가장 개방된 나라에 와서 가장 폐쇄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죠.”


빗나가는 아이 보며 역이민 고민중


28-2.jpg

(사진/아이들 교육을 위해 이민을 온 이들은 맞벌이 때문에 아이를 돌볼 시간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전직 공무원 출신인 박아무개(50)씨는 자식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이민갔다가 되레 부모자식 사이가 더 멀어져 속앓이를 하는 경우이다. 박씨는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들과 중학교 3학년인 딸 등 남매를 두고 있다. 이민을 떠나기 전만 해도 캐나다에 가면 자식들의 교육문제가 잘 풀릴 것으로 믿었다. 물론 캐나다의 교육환경은 좋았다. 고등학교까지는 돈을 한푼도 안 내고 다닐 수 있고, 담임교사에게 촌지를 줄까말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의 현지적응도 빨랐다. 처음에는 현지 친구들과 서먹서먹하게 지내더니 불과 3∼6개월이 지나니까 영어가 유창해지고, 친구들도 금세 여러명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자식들에 비해 안씨 부부의 현지적응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아이들에 견줘 영어 실력이 잘 늘지 않다 보니 현지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다. 더구나 아이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급격히 현지화하다보니 부모·자식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갔다. 대화를 해도 사사건건 부딪쳤다. 박씨는 자식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맞춰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아이는 점점 부모와의 대화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가끔 아이들이 과연 내 자식이 맞는가라고 반문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아침식사 때만 잠깐 얼굴을 마주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민을 괜히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고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던 아이들이었는데….” 결국 아이들은 남겨둔 채 박씨 부부만 지난 8월 되돌아왔다.


미국 휴스턴에서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박아무개(44)씨는 이민생활 4년째다. 박씨는 최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다. 아들이 학교에서 소문난 불량청소년 대열에 끼여 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식 장래 하나 바라보고 이민을 왔지만 막상 이 얘기를 믿을 만한 사람한테 듣고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박씨는 미국에서는 그저 학교만 믿고 아들을 맡기면 교육문제는 다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더구나 맞벌이를 하고 있는 탓에 더이상의 뾰족한 수도 없었다. 박씨는 처음에는 종업원 하나를 두고 가게를 꾸려 나갔으나 인건비 등을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인건비라도 아낄 요량으로 종업원을 내보내고 부인과 함께 가게를 꾸려 나갔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다보니 사이에 자식이 빗나가는 것도 모르고 지나친 것이다.


이런 사정은 다른 이민자들도 비슷비슷하다. 미국 이민자들은 억대 부자가 아닌 바에야 대부분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 혼자 벌어서는 집세, 자동차세 등을 대기에도 빠듯하다. 이민자들에게 왜 이민을 떠나느냐고 물어보면 90% 이상은 2세 교육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대학진학의 부담감이나 촌지, 과외비와 같은 별도 지출이 없는 선진국은 한국의 교육환경에 지친 부모나 자녀 모두에게 별천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맞벌이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식들에게 소홀해진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다보면 자식들이 밖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물어볼 새도 없다. 박씨는 아들이 더 빗나가기 전에 대책을 세우기는 하겠으나, 최악의 경우 아들을 위해서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고 한다.


사전준비가 없으면 이민은 고생길


캐나다 캘거리에서 쌀가게를 하다 고국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는 김아무개(49)씨도 아들 때문에 고민이다. 몇년째 대학졸업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이제는 고생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김씨였다.


김씨와 비슷한 속앓이를 하는 부모는 의외로 많다고 한다. 한국인이 많이 이민을 떠나는 캐나다의 경우 중·고등학교 다닐 적 성적을 기준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단 입학하기는 쉽다. 하지만 졸업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아무래도 어학능력이 달리는데다, 우리 대학처럼 대충 놀면서 공부하다가는 졸업할 수 없을 만큼 빡빡한 수업일정을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민자들이 남모르게 겪는 고초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게 역이민을 온 사람들의 목소리다. “이민의 행복은 치밀한 사전준비와 노력을 쏟은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한번쯤 새겨들을 대목이다.


임을출 기자

h21taillogo.gif


chul@hani.co.kr


한겨레21 1999년 12월 23일 제288호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1213/1pascd01.html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귀농하는 역이민 동포들, 현지인과 갈등 해결이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