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고학력·기술 없으면 이민 어렵고 강한 의지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 글·송홍근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3.10.02 14:37:00
최근 한 홈쇼핑 방송에서 판매한 이민 상품에 이민희망자가 폭발적으로 몰려 화제가 되었다.
또한 9월에 열린 해외 이주·이민박람회에 1만5천명이 몰리는 등 이민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그 뒤안을 보면 곳곳이 허방이다. 홈쇼핑 방송의 이민상품은 허점이 많고, 이민 예정자들을 기다리는 장벽도 높기만 하다. 최근 불고 있는 이민열풍의 현상과 문제점을 집중 취재했다.
전문가들은 막연한 준비로 해외이민을 준비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캐나다 매니토바주의 주도 위니펙의 겨울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다. 버스정류장마다 난방시설이 가동되는 피한처가 마련돼 있고 다운타운의 건물들이 ‘스카이워크’라고 불리는 방한 육교와 지하보도로 연결돼 있을 정도로 추위가 악명을 떨치는 도시다. 10월말부터 4월초까지 이어지는 긴 겨울 동안 위니펙은 밖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이 ‘올스톱’ 되는 동면에 접어든다. 시민들의 삶도 활력을 잃기는 마찬가지. 시민들은 매일 아침 24시간 방송되는 기상방송국에 귀를 기울이며 ‘즉시 동상 위험’ ‘피부 노출시 1분내 동상’ 등의 경고 문구가 뜨지 않는지 눈을 떼지 않는다.
살을 에는 추위 탓에 어학연수생도 기피하는 캐나다 중부의 작은 도시 위니펙이 최근 한국에서 ‘느닷없이’ 유명세를 탔다. 현대홈쇼핑의 ‘이민상품’ 방송 덕이다. 첫 방송에서 매니토바 이민상품은 대박을 터뜨렸다. 단일 품목 단일 방송시간 사상 최고 주문매출액인 1백75억원(9백83명 신청)을 기록한 것. 그릇된 이민열풍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홈쇼핑측은 두번째 방송에선 “영주권을 무조건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고 수차례 강조하는 등 광고 수위를 크게 낮췄지만 역시 대박을 터뜨렸다. 1차 판매 때의 3배인 5백30억원(2천9백35명 신청)의 주문매출액을 기록한 것.
현대홈쇼핑에서 이민상품을 신청한 30대 주부 K씨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이민상품 광고 방송을 듣고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먼저 이민간 친구들한테서 “여자들 살기에 캐나다만한 곳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망설이는 남편을 설득해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다 자격미달로 여러 번 실패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K씨의 남편은 처음엔 이민에 부정적이었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외국에서 장사치로 살 수는 없다는 것. 하지만 K씨가 친구들로부터 전해들은 좋은 교육여건과 여유로운 삶에 대해 들려주자 이내 마음이 돌아섰다. 하지만 K씨의 학력과 경력으로 영주권을 받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현대홈쇼핑의 이민상품이 대박을 터뜨린 것은 바로 K씨처럼 ‘이민은 가고 싶은데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기 때문이다. 요즘 캐나다 ‘연방이민’은 매우 어렵다. 투자이민과 비즈니스이민은 웬만한 돈이 없으면 떠나기 힘들고, 기술(독립)이민은 석사 이상의 학력에 영어가 유창하고 배우자의 학력이 전문대졸 이상이며 해당 분야에서 4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간신히’ 명함을 내밀 수 있다.
현대홈쇼핑은 독립이민(수수료 6백20만원), 기업이민(8백50만원), 기술취업이민(2천8백만원) 상품을 판매했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기술취업이민. 연방이민 자격에 턱없이 부족한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취업비자를 받은 뒤 영주권을 얻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한 캐나다 대사관 이민과 관계자는 “업체측이 광고한 조건으로 계약한 사람들을 매니토바 주정부가 받아들일지 미지수”라며 “그동안의 관행과 비교할 때 턱없이 낮은 조건을 내세웠다”고 말했다.
현대홈쇼핑에 이민상품을 납품한 이민타임 관계자도 “이민신청이 받아들여질지 거부될지는 두고봐야 한다”며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할 경우 납입한 돈의 20%를 돌려줄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다. 영어교육비 40%와 기술교육비(트럭·중장비 운전교육, 자동차 정비교육 등) 40%는 비용으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기술취업이민 신청자들은 최악의 경우 영주권도 못 받고 돈만 날리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캐나다의 주별 이민프로그램은 1년에 받을 수 있는 이민자 수가 정해져 있다. 지난해 매니토바주의 이민 쿼터는 1천5백명. 이 숫자에 들기 위해 전세계의 희망자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매니토바주에 1백20세대를 보냈다는 온누리 이주공사 안영운 대표는 “홈쇼핑을 통해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 중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40∼50명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무작정 이민’을 떠나려다 시간과 돈만 낭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9월 열린 해외 이주·이민 박람회에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이 1만5천명이나 몰려 충격을 주었다.
회사원 이은영씨(34)는 지난해 이민 주신청자를 남편에서 자신으로 바꿔 이민에 도전하고 있다. 4년 전부터 남편 이름으로 영주권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하는 남편의 학력과 경력, 재력으로는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던 것. 이씨는 이학석사 학위를 갖고 있는 자신이 직접 지원하는 편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이주공사의 말을 듣고 주신청자를 바꾸었으나 아직까지 ‘좋은 소식’은 없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살고 싶은데 벽이 너무나 높더라고요. 그렇다고 막일을 해야하는 비숙련공 이민을 갈 수는 없고 경력을 살려서 취업을 해야 하는데, 일을 시키겠다는 고용주가 없나 봐요. 일단 남미로 이민 간 뒤 재이민을 떠나려고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오르는 아파트 값을 따라갈 수 없는 이런 나라에서 더 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민 가기가 정말 어렵네요.”
이씨처럼 어학연수 경험이 있는 젊은 기혼자들과 미혼여성들 사이에서 이민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도 최근의 현상이다. 서울 K대를 졸업한 김모씨(28·여)는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가 도전하고 있는 것은 미국 비숙련공(EB-3) 비자를 받는 것. 김씨와 같은 ‘무작정 이민 희망자’가 도전할 수 있는 비숙련공 이민은 학력 성별 경력 영어능력에 제한 없이 만 55세 미만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이주공사 등에서 ‘가장 손쉬운 이민 루트’라고 광고하고 있으나 한국의 3D업종과 비슷한 일을 미국에서 한다고 보면 된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주요 이민 대상국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4개국. 지난해부터 이들 4개국이 이민 관련 법규를 고치면서 한국인이 영주권을 받기는 상당히 어려워졌다. 미국은 시민권자 영주권자가 직계가족을 데려오는 방식을 제외하고는 이민쿼터가 매우 적고, 호주와 뉴질랜드는 높은 학력과 유창한 영어구사 능력을 요구하고 있어 이민 길이 거의 막혀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은 캐나다도 이민 대기자 수가 50만명에 이르러 ‘돈이 아주 많거나’ ‘아주 특별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주권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
사정이 이러니 이민에 목을 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기이한 이민상품이 뜨기도 한다. 이주공사들이 피지, 몰타, 에콰도르, 과테말라 같은 나라의 이민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것. 이주공사들은 주요 국가의 이민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민 희망자를 대상으로 이들 국가로의 이민을 경쟁적으로 추천하고 있는데, 물론 이들 국가로의 이민은 자격이 까다롭지 않아 비교적 쉽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지에서 생계를 유지할 뚜렷한 수단이 없는 터라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이민 전문가들은 경고했다.
9월6∼7일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전시장에서 열린 ‘제6회 해외이주·이민박람회’에서 과테말라 이민상담을 하고 있던 곽모씨(33)는 혼란과 모순 투성이인 한국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호주는 솔직히 조건이 안되더라고요. 과테말라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외국에 정착하는 게 목표예요.”
몰타는 4억5천만원 이상의 자산 증명, 또는 2천5백만원 이상의 연소득 증명이 있으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영주권이 있어도 취업허가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데, 취업허가를 받으려면 사업체를 세우거나 고용주의 보증이 필요하다. 피지는 45세 이상은 약 8천4백만원, 45세 이하는 약 6천만원을 피지 금융기관에 예치하면 이주할 수 있다. 에콰도르, 과테말라 등도 영주권을 쉽게 얻을 수 있어 곽씨처럼 “한국에선 도저히 못살겠다”는 사람들에게 도전의 땅이 되고 있다. 과테말라 이민컨설턴트 김태선씨는 “과테말라 이민은 일단 한국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있다”며 “기존 이민국가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을 위주로 프로그램을 출시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피지 몰타라도 좋으니 한국을 떠나겠다”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작구 상도동에 사는 주부 장나현씨(36)는 내년에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장씨가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좋은 환경에서 가르치고 싶어 지난해부터 강남 아파트를 알아보면서부터. 무리를 해서라도 강남으로 이주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수입으론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40평대 아파트를 20평대로 줄이고도 2억원을 더 대출받아야 했던 것. 장씨는 돈을 엉덩이에 깔고 사느니 아예 이민을 가는 게 났다고 판단했다. 장씨의 경우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가고싶은 이유로 가장 먼저 꼽는 게 교육문제다.
자녀교육, 경기침체 등을 이유로 해외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민열풍은 극심한 취업난과 고용불안, 경기불황, 지도층 인사들의 비리 등에서도 기인한다. 이민 박람회를 찾은 회사원 김찬연씨(34)는 어학 연수차 머문 경험이 있는 캐나다를 이민지로 생각하고 있다. 학사 학력이라 이민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김씨는 “한국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성공할 수 없는 사회다. 정치 난맥상과 온갖 부정과 비리가 판치고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내 아이만이라도 정직한 사회에서 바르게 자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민열풍이 불고 있지만 그 뒤안을 보면 곳곳에서 허술한 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열풍의 현장을 보여준 현대홈쇼핑의 이민 상품은 허점이 많고, 이민 예정자들을 기다리는 장벽도 높기만 하다.
이민 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민 갔던 이들 가운데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이도 상당수다. 지난해 총 이민자는 1만1천1백78명. 하지만 반대로 이민에서 되돌아온 역이민자도 3천여명에 달했다. 현지 적응에 실패한 이들 가운데는 가족만 현지에 남기고 자신만 돌아와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는 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처음부터 전가족 이민 형식을 취하면서 막상 자신은 떠나지 않고 남는 이도 있다. 한국생활의 불안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보험용’으로 영주권을 얻어두고, 이중생활을 하는 것이다.
모은행 김모 부장(42)은 서류상으로는 4년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지만 한국을 떠나지 않고 계속 국내 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이 사실이 회사측에 발각되면서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있지만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어차피 부인과 아이들은 이민을 떠나 그곳에 적응해나가고 있고 자신은 국내에서 계속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 그는 직장에서 가능한 한 오래 버티며 돈을 번 뒤 퇴직하면 가족들과 합류할 계획이다.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최모씨(48). 그는 의료보험과 좋은 교육환경을 믿고 명예퇴직금과 부동산을 처분한 돈으로 이민을 왔다. 문제는 현지에서 직장을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 게다가 저금리로 은행에 예치한 돈의 이자도 얼마 되지 않아 심각한 경제난에 부닥쳤다. 현재 그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가족만 남겨둔 채 서울로 돌아갈 것을 구상중이다.
이민 대열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크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규범이 무너지고 믿음이 실종돼 희망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민사회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국내의 불확실성보다는 오히려 그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에 대한 불신의 결과로 생겨난 이민 행렬을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힘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 그들이 한번 떠나면 영원히 우리 사회와 담쌓고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외국에서 더 애국심이 증대돼 거꾸로 한국사회에 기여할 가능성도 높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민 행렬을 한꺼번에 멈출 수 없다면 기왕에 떠나는 이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오히려 우리 사회에 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동아 2003년 10월 4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