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1
뉴욕에서 지역별로 코로나19 확산세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사진=이미지투데이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루소, 볼테르. 독일의 철학자 칸트와 시인 실러, 그리고 폴란드의 작곡가 쇼팽.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근대 유럽에서 결핵은 귀족들의 질병이었다. 파티 등 집단 사교활동을 즐기고 평민들과 달리 주로 실내에서 생활한 상류층들은 결핵 감염에 취약했다.
하지만 당시엔 결핵이 감염병이란 사실을 몰랐다. 어치구니 없게도 오히려 결핵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피 묻은 손수건은 예술적 열정과 천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전염병 피해도 '빈부격차'
결핵의 정체가 밝혀진 건 1882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결핵균을 처음 발견하면서다. 이 발견으로 코흐는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1905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결핵과 달리 중세시대 흑사병(페스트)은 귀족보다 농노들을 주된 희생자로 삼았다. 14세기 유럽인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 창궐 당시 귀족들은 하인들을 이끌고 시골로 피신했다.
하지만 농노들은 사는 곳을 떠날 수 없었다. 피난 길에 먹을 식량과 거처를 구할 돈이 없는 평민들은 하릴없이 페스트에 죽어갔다.
코로나19(COVID-19)는 어떨까.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초기엔 해외 여행이 잦은 고소득층의 감염률이 높았다. 하지만 지역감염이 본격화된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한적한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이들과 그렇지 못하는 이들의 운명이 갈리고 있다.
뉴욕시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기준으로 고소득층이 몰려사는 맨해튼 지역의 인구 10만명당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992명으로 집계됐다. 반면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브롱크스 지역은 2308명에 달했다.
페이스북이 카네기멜론대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산출하는 지역별 코로나19 유증상자 비율도 4월25일 기준으로 맨해튼이 0.99%인 반면 브롱크스는 1.82%에 달했다. 같은 뉴욕시에 속하면서도 지역에 따라 감염률이 2배 가량 차이가 나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맨해튼에 살 경우 대체로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하지만 브롱크스 주민들은 중심지인 맨해튼까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 상대적으로 감염에 노출될 위험이 높다는 점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또 맨해튼의 부자들이 코로나19를 피해 시골로 대거 피신하면서 한시적으로 맨해튼의 거주 인구 자체가 줄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뉴욕시 위생국에 따르면 외출금지령의 여파로 지난 3월 뉴욕시 대부분 지역에서 쓰레기 배출량이 전년 동월 대비 10% 이상 늘었는데 맨해튼 부촌은 오히려 5% 줄었다.
반면 같은 달 미국 북동부의 대표적 휴양지인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Cape Cod)에선 숙박공유서비스 에어비앤비의 매출이 600% 폭증했다.
코로나 피난가는 지도자들
비단 미국 만의 문제는 아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프랑스의 대표적 부촌으로 유명한 파리 16구에선 3월17일 봉쇄령 발효 전까지 주민의 약 15~20%가 빠져 나갔다. 반면 프랑스 서부의 휴양지 누아르무티에섬에는 봉쇄령 2주 만에 체류 인구가 기존의 2배에 가까운 약 2만명으로 불어났다.
미국내 코로나19 관련 사망자 통계는 인종 문제를 비극적으로 드러낸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흑인 인구는 14%에 불과하지만 지난달말까지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흑인은 약 33%를 차지했다.
흑인들의 당뇨병과 심혈관 질환 등 기저질환 보유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만으로 설명이 될까. 미국의 높은 의료비 부담에 따른 의료시설 접근성 문제와는 과연 무관할까.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전국적 봉쇄 조치로 미국에선 불과 6주만에 30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경제활동인구 5명 가운데 1명 꼴로 실업자로 전락했다. 해고됐다면 실업수당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월급만 깎인 이들은 오히려 사정이 더욱 어렵다.
이런 판국에 가수 마돈나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코로나19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다"는 글은 기층민들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 탓에 공감보단 공분만 자아냈다.
코로나19를 피해 개인이 소유한 섬으로 도피한 뒤 호화 요트 사진과 함께 "모두들 안전하길 바란다"는 글을 올린 부호도 상태적 박탈감을 자극하긴 마찬가지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누가 탓하겠느냐만 그걸 소셜미디어로 자랑하는 건 다른 문제다.
국가 지도자의 '내로남불'식 가족 여행은 또 어떤가. 국민들에게 여행 자제를 당부하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부활절을 맞아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도 소셜미디어로 "제발 제발 집에 있으라"고 호소한 뒤 정작 본인은 가족들과 함께 부친 소유의 골프 리조트로 여행을 떠났다. 앞으로 누가 이런 이들을 따르겠나.
예로부터 감염병은 기존 권위에 균열을 가져오곤 했다. 과거 페스트가 돌 때 고위 성직자들은 교구민들을 버린 채 시골로 도망갔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인본주의 르네상스가 싹튼 계기 가운데 하나로 페스트가 지목되는 이유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세상은 어떨까. 누구든 기존의 권위를 지킬 수 있을지는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20050416118047636
☞ 본 기사는 <머니S> 제644호(2020년 5월12~1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상배 뉴욕 특파원
kjhnpce1@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