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소장 Dec 07. 2023

10. 연산군은 왜 쫓겨났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연산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술에 취해 예쁜 기생들과 어울려 노는 미친 왕의 모습?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조선의 금쪽이?


간신의 한마디에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인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 


그러나 연산군의 어린 시절은 그저 평범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무엇이 그를 막 나가게 만들고 쫓겨나게 했는지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공부 스트레스 없던 어린 시절     


 어릴 때부터 스카이캐슬에 버금가는 교육열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인수대비)의 기대와 신하들에 의해 유교의 나라 조선에 맞는 성군으로 길러져야 했던 성종은 어린 연산군이 안쓰러웠습니다.


 연산군에게도 성종만큼 학문을 원했던 신하들이 빡빡한 스케줄로 공부시키려 하자 성종은 신하들을 말리며 차차 공부에 흥미를 느낄 날이 올 테니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산군은 비교적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연산군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될 만큼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었다면 아직 어리긴 했지만, 새어머니 정현왕후가 낳은 진성대군이 있었으니까요. 엄마도 쫓겨난 연산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치를 좀 봐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은 연산군     


 성종에 이어 연산군은 조선의 열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성종만큼 공부는 못했지만 나름 세자의 자리에 있으며 생각을 많이 했던 연산군은 왕이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요?


 늘 대간들의 잔소리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평가받을 모습을 늘 신경 쓰던 성종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즉위하자마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죠.     


 연산군이 왕이 되자마자 대간들은 성종처럼 연산군을 길들이려 했습니다. 시작은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 시행이었죠. 역대 왕들이 모두 했던 것이지만 성종은 불교를 믿지 않았으니 하면 안 된다고 주장을 하는 삼사 관원들과 유생들은 그 사건 이후로도 무슨 일만 생기면 사직 카드를 쓰며 연산군을 불편하게 만들었죠.


 이런 행동들을 지켜보던 연산군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을 합니다. 그리고 후에 그들에게 복수를 하게 되죠.     


-연산군의 업적


 신하들이 사사건건 반대하긴 했지만 그래도 연산군은 나름의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가려져 다뤄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해보자면 문종 이후 소홀했던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비융사 (비변사의 전신) 를 만들어 병기를 제조하고 가죽으로 만들던 갑옷을 철제 갑옷으로 제작하게 했다고 합니다.


 변방을 지키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보상금 또는 세금 면제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하고 토벌했습니다.


<국조보감> 등 여러 서적을 완성하고 사창과 상평창 등을 설치해 빈민을 구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업적들은 두 번의 사화와 연산군의 실정으로 언급조차 되기 어려워졌습니다.

    

- 두 번의 사화   

  

 즉위 초, 나름의 눈치 게임을 하며 상황을 보고 있던 연산군에게 기회가 옵니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김일손의 사초에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발견되었고 그뿐 아니라 기존 대신들의 비리가 담겨 있다는 것도 찾아내게 된 것이죠.


 이 싸움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자기들끼리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으로 진행되었고 연산군은 손쉽게 사림을 제거해 대간 세력 장악에 성공했죠. 실력 있는 유학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대간 세력은 위축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연산군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대간은 없었죠.


 연산군은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하나둘 시작합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냥하고 사치하며 국고를 낭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로대신들은 연산군의 사치를 방관하며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러나 국가 재정이 엉망이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산군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부족한 국고를 채우려고 했고 공신에게 지급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고 했죠. 이에 훈구파가 크게 반발하게 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궁중의 소비를 줄여야 한다 주장하며 왕의 무절제한 생활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을 만들어 낸 연산군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며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연산군이 방치된 어머니의 묘를 이장해야겠다고 하자 신하들은 또 패를 나누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죽일 계획이었죠.


 여기서부터는 연산군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어서 기록된 부분들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연산군은 우선 아버지가 총애하던 후궁들 엄숙의 정소용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함한 죄를 물었는데 두 후궁을 거적으로 말고 이들의 아들을 불러 어미를 치게 했습니다. 한 명은 거적 안에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매를 들었지만 한 명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려 차마 때리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새어머니인 정현왕후를 찾아가 따지려 하니 연산군의 아내 신씨가 말려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를 쫓아낸 결정적인 사람 할머니 인수대비를 찾아가 따졌다고 하죠. 어미를 때리던 아들 두 명을 데리고 가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주들이라며 술잔을 받으라고 하기도 했고 연산군이 인수대비 머리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확인은 어렵습니다.


 중요한 건 이 사건 이후 스트레스와 건강 악화로 인수대비는 죽게 된다는 것이죠.      


 김일손의 사초로 시작했던 무오사화와는 다르게 폐비 윤씨 사건으로 시작한 갑자사화는 더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관련된 자들이 대부분 죽은 것은 물론, 이미 죽은 자들의 시체를 꺼내 해골을 빻아서 날려버리기도 했다고 하죠.


 폭정이 심해지자 마음먹고 바른말을 했던 내관 김처선의 팔과 다리를 자르기도 했는데 죽어 가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자 결국 잔인하게 죽인 후 앞으로 처자가 들어간 단어를 사용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했다고 하죠. 실제로 김처선의 부모 무덤을 파헤치고 과거 시험 답안에 처자가 들어갔던 사람들을 낙방시켰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연산군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사치와 향락에 더 빠지게 됩니다. 사간원을 폐지했고 사헌부를 축소했으며 홍문관도 폐지하고 절대 왕권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독재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죠.


지금은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지만 자칫 하다가는 언제 무슨 이유로 연산군의 눈 밖에 나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연산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국가 재정이 불안해져 세금을 과하게 내야 하는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하자 언제 누가 반정을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중 연산군의 변덕에 힘을 잃게 된 성희안과 박원종이 주도하여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고, 자기들도 연루되어 해를 입을까 걱정하던 대신들은 반정 세력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면서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지요.


 연산군도 자신이 했던 일이 과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잡히면서 ‘내 그 난리를 쳤으니 이리될 줄 알았다’라고 말을 남겼다고도 하네요.      


 결국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지게 되었고 얼마 후 죽게 됩니다. 전염병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처에 있던 누구도 같이 병에 걸린 일이 없기도 하여 맞는지 확실하지 않고, 독살이라는 이야기는 증거가 없고,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태어나서부터 화려한 궁궐 생활을 하다가 강화도 좁은 곳에서 살게 되니 적응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죽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연산군의 죽음은 최측근들도 아쉬워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연산군의 아들이던 세자가 왕이 되어 괜찮아졌을 거라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고 하네요.      


 연산군이 남긴 잔혹한 이야기들로 조선 최고의 사이코패스라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지만 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연산군을 보고 싶었습니다.


 누가 왜 어떤 상황이 연산군을 그렇게 만들었고 어떤 선택들이 역사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게 될지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9. 성종은 왜 경연을 9000번 넘게 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