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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Dec 07. 2023

9. 성종은 왜 경연을 9000번 넘게 했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한명회의 사위     


 성종은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 세자와 나중에 인수대비로 더 유명해지는 세자빈 한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의경 세자가 궁궐에 있었기에 성종은 궁궐에서 태어났고 생활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의경 세자가 죽고 동생 예종이 새로운 세자가 되자 성종과 어머니 인수대비 형 월산대군은 궁궐을 나와야만 했었죠. 이를 안쓰럽게 여긴 세조와 정희왕후는 이들이 궁궐에서 계속 살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궁을 나가겠다고 했고 세조는 궁밖에 좋은 거처를 마련해주는데 이곳이 현재 덕수궁입니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다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머물러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죠.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그 당시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글을 알고 있던 엘리트였는데 유교 경전을 읽었으며 교양이 넘치고 능력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인수대비의 아버지이자 성종의 외할아버지 한확은 누이 두 명을 명 황제에게 공녀로 바치는데 그 미모가 뛰어나 황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이 그를 두고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조선에서 그 입지가 탄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로 다녀오던 길에 죽으며 그 힘을 더 이상 과시할 수 없게 되기도 했지요.      


 이런 집안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인수대비는 지금으로 치면 스카이캐슬 버금가는 열혈 엄마였던 것 같습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으로 형 월산대군과 성종을 교육했는데 이를 두고 세조와 정희왕후는 폭빈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두 아들은 그 교육방식에 성실히 따라주었는지 월산대군은 몸이 약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학문이 대단했다고 하고 왕이 된 성종 역시 조선의 왕 중 사대부의 나라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한 왕이 되었죠.


 그렇게 열심히 때를 기다리며 공부하던 성종과 인수대비에게 기회가 옵니다.      


 의경 세자 대신 왕이 되었던 예종이 4살이 된 제안 대군만을 남겨두고 죽게 되자 성종은 왕이 됩니다. 형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둘째인 자을산군이 왕이 된 것은 장인이 한명회였기 때문이죠.


 월산대군은 몸이 약했고 자을산군은 궁궐에 내려친 벼락에 맞아 환관이 즉사하는 일이 있었을 때도 담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정권을 잡고 있던 한명회의 사위라서 라는 이유가 더 합리적인 의심이겠죠.


 예종의 후계를 자을산군으로 결정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도 아직 어린 성종이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한명회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성종의 첫 번째 부인이자 한명회의 딸이던 공혜왕후가 죽게 되면서 두 번째 부인을 들이는데 후궁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숙의 윤씨를 선택했지만 결국 이 선택은 조선을 위기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죠. 그 여인은 폐비 윤씨로 연산군의 엄마였습니다.      


 13살 나이에 왕이 된 성종을 대신해 할머니인 정희왕후는 뒤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똑똑한 며느리인 인수대비에게 넘기려고도 했지만, 상황 파악을 잘했던 인수대비는 받지 않았죠.


 다행인 것은 정희왕후는 정치에 큰 간섭은 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 결정만 도와주면서 성종이 성군으로서 자라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한명회와 신숙주 등 원로대신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죠.     


-한명회의 몰락     


 계유정난 이후 최고의 공신은 한명회였습니다. 세조는 한명회의 의견이 나의 의견이라며 그를 신뢰했죠. 하지만 세조가 죽고 둘째 아들 예종이 왕이 되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세조와 달리 예종은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예종에게 시집보낸 딸마저 죽고 없었지요.


 그러나 예종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한명회에게는 다시 기회가 오게 되었거든요. 또 다른 사위이자 아직 어린 성종이 왕이 되었고 그를 수렴청정하게 된 것은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였으니까요.


 권력의 중심 세력이 된 한명회는 끝도 없이 재산을 늘리고 온갖 사치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종이 자라 친정을 하게 되면서 한명회의 시대도 저물어 가게 되었죠.     


 지금도 유명한 곳이죠. 경치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한강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사신이 오면 꼭 가야 하는 필수 관광코스가 되었습니다. 그날도 중국 사신이 놀러 온다고 하는데 압구정이 좁아서 행사를 치르기 어려우니 성종에게 장막을 좀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는데 성종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사신 접대 장소를 다른 곳으로 변경하게 되는데 이에 서운했던 한명회가 부인 핑계를 대고 참석을 안 하게 되자, 이때다 싶었던 대간들은 한명회의 무례함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덮었을 성종이 말이 없자, 한명회는 눈치를 채고 먼저 달려와 사과하며 관직을 내려놓게 되었죠.


 이렇게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짐작했던 한명회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연산군에 의해 시체가 꺼내어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기도 하죠.      


 왕보다 더 높은 권력을 지녔지만, 나라를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휘두른 욕망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희망을 없애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명회와 세조의 만남은 둘에게 화려한 삶을 선물했을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역사에는 아주 안타까운 장면이 되었죠.     


-불행의 씨앗, 폐비 윤씨     


 성종을 왕위로 올려준 첫 번째 부인,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가 죽게 되자 성종의 후궁 중 참해 보이는 숙의 윤씨를 새로운 중전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중전이 된 숙의 윤씨는 성종의 아이를 낳게 되자 그 태도가 변했죠. (산후 우울증이 아니었나 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성종이 낮 동안 신하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러 여인을 만나거나 과음하는 등 모습을 보이자, 숙의 윤씨는 잔소리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종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중전이 싫어지게 되었고 숙의 윤씨에게 따귀를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죠. (그러나 이 사건은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상하게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야사에 나온 이야기가 사실로 굳어진 경우입니다. )


 임금을 해하려고 비상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자작극 등 증거가 확보되었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일들이 많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성종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것이었죠.  그리하여 윤씨는 궁궐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궁궐 밖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던 숙의 윤씨는 시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왕자의 엄마를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도 사약을 받게 되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죠. 그리고 이 사건은 연산군 때 무자비한 사화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유교의 나라, 조선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대부분의 훈구파 대신도 죽었기 때문에 원상제를 폐지하고 결재권을 되찾아 올 수 있었지만, 그들의 아들 손자 친척 등 새로운 네트워크가 깊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종은 지방의 사림 세력을 불러 그들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려고 했죠.


 하지만 사림의 유교는 조선 초의 실용적인 유교와는 그 목표와 방향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상하 관계를 지키기 위한 유교, 종교화되는 유교, 왕 앞에 바짝 엎드렸지만 결국 그들의 뜻을 이뤄내기 위한 유교로 백성의 안녕을 위한 성리학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성종 역시 그런 유교의 나라 왕으로 존재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경연하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죠.  토론을 좋아했던 세종도 2000회 정도 했던 경연을 성종은 9000회 넘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선왕들이 하던 유교 사업의 결과물을 완성해 내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정도전이 초안을 작성했던 <조선경국전> 이후 왕들이 수정을 거듭하고 할아버지 세조 때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다가 예종 때 완성되고 반포 직전이었던 <경국대전>을 시대에 맞게 다시 수정하여 편찬해 내었습니다.


 국왕의 뜻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닌 이제 경국대전에 명시된 대로 결정하게 되었지요.     


 또한 <국조오례의>도 완성했습니다. (국조오례의 : 조선 시대 다섯 가지 의례를 규정한 책으로 건국 초기 나라의 의전이 갖추어지지 못해 태종이 명하여 길례와 서례 의식을 만들고 세종이 나머지 의례를 규정화했습니다.


 국조오례의는 세종실록과 동시에 편찬을 시작했으나 성종 대에 완성되었습니다.)      


 다양한 서적 편찬 사업을 마무리한 성종은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홍문관을 설치하고, 대간의 역할을 다시 늘렸습니다. 대간은 관리의 감찰과 탄핵 정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 이 두 언관의 관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대간이 되려면 가문도 좋아야 했고, 강직한 성품을 지녀 정치의 잘못과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단단한 실력과 청렴한 성품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정도전은 대간들로 정치가 부패해지는 것을 막으려 했고 이 기능은 분명 좋은 점도 가지고 있었지만, 싫은 소리를 견디지 못한 성종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고 이를 보고 자란 연산군은 대간의 기능을 없애버리기도 했죠.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 역시 대간들의 바른말에 지쳐 조광조를 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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