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의 영화 <란 12.3>'
영화 <란 12.3>을 보고 나오며 나는 오래 시간 잊고 지냈던 한국 영화의 고귀한 예술혼을 발견한다. 그것은 단지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본 뒤의 감상이 아니라, 영화가 아직도 현실의 상처와 시대의 균열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의 먹먹함에 가까웠다. <란 12.3>은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사태와 그 밤을 건너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시간을 담아낸 이명세 감독의 다큐멘터리다. 우리 헌정사에서 다시는 있어서 안될 그날을 기록하는 예술가가 이명세라는 것이 또 얼마나 상징적인 일인가.
한국 영화사에서 이명세는 이야기를 단순히 전달하는 연출가가 아니라, 이미지와 리듬과 사운드의 파장으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다시 빚어내는 불세출의 스타일리스트로 기억되는 감독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Duelist>를 지나며 그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사건의 요약이 아니라 이미지의 정서적 각인, 스토리의 설명이 아니라 감각의 문장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란 12.3>은 바로 그 이명세식 영화 문법이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안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익숙한 인터뷰와 해설의 방식에 기대지 않고, 시민들이 남긴 영상과 사진을 엮어 거대한 시네마틱 콜라주로 밀어붙인다. 그 결과 <란 12.3>은 어떤 사건의 기록을 넘어, 그날의 공기와 속도와 공포와 분노를 육체적으로 되살려내는 드문 체험이 된다.
무성영화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편집과 음악, 그리고 총구를 연상시키는 프레임 같은 장치들은 이 비현실적인 밤이 얼마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는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지금 이 시점에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란 12.3>은 지나간 사건을 봉인하는 영화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끝내 다시 불러오는 영화다. 이명세 감독이 유신의 시간을 통과한 세대로서 느낀 부끄러움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힌 대목은, 이 작품이 단순한 시사 다큐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윤리적 응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란 12.3>을 한 편의 영화로만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기록이면서 경고이고, 굴복하지 않는 위대한 대한 국민의 선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아직 한국 영화가 엄혹한 현실 앞에서 결코 침묵하지 않고 온 감각을 각성시키는 '창조적 시네마'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